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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r 14. 2022

동화라는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

송미경, 『복수의 여신』, 창비, 2012

* 쪽수: 140



송미경의 작품에는 흔히 '선을 넘는다'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는 물론 송미경이 매우 유연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작가라는 뜻이겠지만, 동시에 여전히 많은 독자가 동화라는 형식에 대해 틀에 박힌 기대를 품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복수의 여신』에 실린 이야기들을 지금 읽으면 그렇게 신선한 느낌은 들지 않거든요. 당연한 거죠. 어떤 작품이 발표된 지 10년이 지나고도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 작품이 소비되는 맥락의 건전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송미경은 동화의 경계선을 넘는 작업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관심이 없어 보여요. 그건 그냥 동화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막연한 관념을 품고 있는 독자에게나 중요한 말이죠. 실은 동화라는 틀에 관한 형식적 요건에 관한 논쟁에는 어딘가 좀 지루한 구석이 있습니다. 굳이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또 그걸 애써 넘어가야 할 이유가 정말 있던가요. 그러니 동화라는 틀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사실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전 송미경의 동화가 그런 상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미경의 동화에는 학교나 사회, 어른이 정한 규범에 어긋나는 모티프가 자주 등장합니다. 선을 넘는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유효한 지적으로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작품의 메시지가 기존 규범에 여백 없이 순응하고 끝내 별 탈 없이 안착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선을 넘는 일입니다. 그 안에서는 어떤 것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아이가』(시공주니어, 2013), 『돌 씹어 먹는 아이』(문학동네, 2014), 『나는 새를 봅니까?』(문학동네, 2020)와 같은 책도 마찬가지예요. 이 안에 실린 작품들 역시 놀랄 만큼 파격적이지는 않지요. 그럼에도 송미경의 작품에는 ―특히 단편에는― 독자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 힘이 각각의 결말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송미경의 작품을 두드러지게 하는 특징은 유연함보다는 너무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결말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경향은 이번에 소개할 『복수의 여신』보다는 『나는 새를 봅니까?』와 같은 최근 작품에서 더 잘 눈에 띄고요. 그런 완만한 변화를 되짚어보면서 읽으면 『복수의 여신』은 정말 각별하게 재미있는 동화책입니다.


『복수의 여신』은 송미경의 첫 번째 단편동화집입니다. 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첫 작품 「오빠 믿지?」는 사랑스러운 SF입니다. 이 작품을 SF로 분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 분류 행위 자체의 의미 유무를 잠시 내려놓는다면, 전 이 작품이 SF를 동화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단언컨대 이 작품의 결말은 SF적 공상의 날개를 달아주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동화라는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면서 '동화적', 'SF적' 운운하는 과문함을 양해해주시길) 주인공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여자아이이고, 한 살 많은 교회 오빠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독자의 눈에 이 오빠는 주인공과 똑같이 어린아이에 허풍쟁이로만 보이는데, 그와 별개로 소녀의 관점을 따라 오빠의 정체를 파악해가는 일은 즐겁고 흥미진진하지요.


「최고의 저녁 초대」에서 독자가 마주치게 되는 건 최악의 저녁 식사 테이블입니다. 이곳에서 주인공 '정하'와 엄마는 정하 친구네 집 저녁 식사에 함께 초대를 받습니다. 엄마는 부잣집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한껏 들뜨지만 만찬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 난장판의 스케일은 우리에게 익숙한 범위를 훌쩍 뛰어넘죠. 「우연 수업」은 교실 속 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겹이 일어난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선생님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그러다 결국 자신 또한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이야기 속 우연은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현실의 우연 또한 결코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저 매일의 무심함에 밀려 익숙해졌을 뿐이죠.


「내 방이 필요해」는 방 두 개짜리 집이 방 다섯 개짜리 집으로 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 뼘도 더 늘어날 수 없는 집에서 가족 모두가 각자의 방을 가지려면, 서로의 공간을 조금씩 내어주는 동시에 적당히 거리를 둘 줄도 알아야겠죠. 이 작품은 균형에 이르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진통을 유의미하게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표제작 「복수의 여신」은 사춘기를 지나는 주인공의 양가적인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좋으면서 싫고, 미운데 자꾸 생각나고, 질투심에 혼자 끙끙 앓다가도 금세 털고 일어나는 주인공의 다채로운 생기가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놀라운 건 이렇게나 깊은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 단편이라는 것이죠.


「일 분에 한 번씩 엄마를 기다린다」에 대해선 독자에 따라 감상이 꽤 다를 것 같아요. 일단 제목이 불안하지요. 어린 주인공이 엄마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란 언제나 어두운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에서 어린 주인공의 불행은 꾸며진 행복에 가려지지 않습니다. 톤은 다르지만 「쿠폰왕」에서도 유사한 정서를 엿볼 수 있고요. 여기서는 동생의 생일잔치를 위해 음식점 쿠폰을 모으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쿠폰을 모으는 방법은 친구들의 숙제 대신해주기고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작은 부정과 타협해야 하는 어떤 유년의 상을 너무 무겁지 않게 조명함으로써, 이야기는 좀처럼 알려지지 않는 세계의 단면을 손바닥처럼 꺼내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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