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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r 21. 2022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최나미,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사계절, 2012

* 쪽수: 184



최나미의 장편동화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은 어린 주인공의 관점으로 서술된 결혼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관찰자 시점은 한국적 가부장 질서의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해 꼼꼼히 설계되어 있습니다. 즉 이 작품의 주인공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엄마의 삶, 나아가 여성의 삶과 외로움을 직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독자는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딸려오는 경험과 감각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주인공은 초등학교 6학년 '장가영'입니다. 가영은 엄마, 아빠, 언니, 그리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를 보살피는 일은 며느리인 엄마의 몫이죠. 가족들은 대체로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특히 아빠는 이 작품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자신의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보다 보면 엄마와 아빠가 지닌 인격과 세계관의 차이가 너무 커서 둘이 한 지붕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지요. 물론 현실에는 이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안에서 아빠 캐릭터는 굉장히 납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삶의 깊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왜소하고 앙상한 인물이지요. 가영은 그런 아빠를 연민하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영의 미래는 아빠의 현재와는 완전히 다르겠죠. 아빠는 사실상 별 가망이 없는 인물이고, 작가는 그걸 얼버무리거나 보기 좋게 포장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야기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도식 위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현실의 인물이 이만큼 평면적이긴 어렵죠. 아마 더 입체적으로 나쁠 거예요.


마흔 번째 생일, 엄마는 전공을 살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빠는 아픈 시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불같이 화를 내죠. 엄마는 담담한 어조로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가족 중 누구도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빠는 어머니가 잘못되면 다 당신 책임이라며 엄포를 놓고, 언니는 드디어 엄마의 반란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가영은 엄마가 왜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할 수 없는지 원망스러워합니다. 가족 중 누구도 그림을 향한 엄마의 진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서글프고 외로운 일이죠.


왜 가영의 엄마는 평범하지 않은 걸까요. 그전에, '평범한 엄마'라는 건 뭘까요. 그 말이 사람을 향한 것이긴 할까요.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속으론 내 입맛에 딱 맞는 꼭두각시를 바랐던 게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내게 거슬리지 않는 엄마, 거슬리지 않는 여성을 갖겠다는 건 너무 폭력적인 생각이겠지요. (실은 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가족이나 학교에 흐르는 정서가 너무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어서, 현시점에선 철이 좀 지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은데 현실이 정말 그런지에 대해선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좀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갑자기 벽에 부딪힌 듯 막막해집니다. 대체 언제까지 요즘 여성은 옛날만큼 차별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야 할까요.)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은 결코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까다로운 식물을 기르듯 매 순간 마음을 쓰고 정성을 기울여 관계를 다듬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멀리 있는 누군가와 비교하며 깎아내릴 때는 그다지 큰 정성을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타인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심지어 허구인― 이미지만 가지고도 눈앞의 상대를 얼마든지 깎아내리고 책임을 돌릴 수 있어요. 그렇게 순간순간을 손쉬운 선택들로 채워 나가다 보면 어느덧 껍데기뿐인 관계만 남는 것이죠. 가영의 가족은 각자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 그로써 어떤 길을 가게 될까요.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짧고 굵은 질문을 인장처럼 새기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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