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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r 31. 2022

익숙한 클리셰들의 조합

박미연, 『시간 고양이: 동물이 사라진 세계』, 이지북, 2021

* 쪽수: 244



굉장히 익숙한 SF 클리셰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2085년의 세계는 뉴클린시티, 노멀시티, 빈민가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된 계기는 25년 전 지구에 나타난 인수공통 바이러스 때문이고요. 그때 '세계인류보존기구'는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을 제외한 모든 포유류를 살처분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인간들만을 위한 특별한 도시, 뉴클린시티를 만들었지요. 노멀시티와 빈민가의 사람들은 뉴클린시티 선발고사를 통해 그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띕니다. 무엇보다도 전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시간 고양이'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시간 여행 클리셰가 중요한 재료로 쓰이는 것은 사실이고, 고양이는 주인공의 중요한 파트너이면서 이 작품의 메시지와도 닿아 있어요. 다시 말해 이 이야기에서 시간과 고양이는 각각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소품이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그 둘을 이어 붙인 제목과 이 이야기의 서사는 많이 동떨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독자가 '시간 고양이'라는 제목에 기대하는 느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요. 여기 등장하는 고양이는 특별하고 영리한 고양이이긴 하지만, '시간 고양이'는 아닙니다.


'동물이 사라진 세계'라는 부제도 붙이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이건 독자를 향한 일종의 라벨링인데, 아쉽게도 포유류의 멸종이라는 배경은 이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소개되는 설정이거든요. 부제로서 실용적이지 않고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아요. 다른 네이밍도 그렇습니다. '뉴클린시티', '노멀시티', '솔라에너지카'와 같은 이름들은 너무나 일차원적이어서 2085년을 배경으로 하는 SF에 잘 어울리지 않지요.


이야기는 주인공 '이서림'에게 고양이 '은실이'가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은실이는 인간을 제외하면 세상에 마지막 남은 포유류입니다. (역시 왜 마지막이어야 하는지는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은실이는 그 정도로 중요한 캐릭터는 아니에요.) 서림의 엄마 '한은채'가 20년 전에 기르던 고양이이기도 하고요. 멸종한 줄 알았던 고양이가 긴 세월을 건너 모녀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겁니다. 서림은 은실이를 따라 모험을 하면서 8년 전 엄마에게 일어났던 사고의 진상과 그 뒤에 감추어진 거대한 내막을 파헤쳐 나갑니다. 그리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죠. 이야기는 독자가 예측하는 범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전개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뻔하고 진부하다는 감상을 피해 가긴 불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익숙한 조합이 주는 강점도 분명히 존재하지요. 『시간 고양이』는 세계적 규모의 바이러스 재난, 디스토피아, 기억 상실, 만능 해커, 동물 복제, 시간여행,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지하 비밀통로, 사악한 세력의 음모, 인간과 자연의 대결 등 다양한 클리셰와 모티프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단계적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립니다. 이후에 찾아오는 결말도 매끄럽고요. 한 마디로 몰입도가 높고 재미있습니다. 이야기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장점이지요.


메시지의 목적지는 지구와 자연입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국제단체 '세계인류보존기구'와 '함께하는 동물 보호 연대'의 가치 대조는 그런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지요. 지구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여러 클리셰를 경유하면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흔들림 없이 지켜낸 것은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났던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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