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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05. 2022

익숙한 현실로 향하는 변주

스콧 니컬슨, 『뱀파이어 유격수』, 창비, 2018

* 쪽수: 92



창비에서 기획한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의 열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정형화된 기획을 그리 선호하는 편이 아닌데, 그럼에도 소설의 첫 만남은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동화에서 소설로 건너갈 즈음의 청소년 독자를 위한 기획 의도에 어울리게 사이즈도 아기자기하고요. 작품 수준도 고르게 우수합니다.


창비, 소설의 첫 만남 세트


『뱀파이어 유격수』는 인간과 뱀파이어가 공존하는 지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다수파는 인간입니다. 뱀파이어에 관한 무시무시한 옛 전설은 미신이 되었고, 인간들은 더 이상 뱀파이어를 맹목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뱀파이어는 그저 똑같이 사회 구성원의 일부일 뿐입니다.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듯 보이던 사회의 규범은 뱀파이어 소년 '제리 셰퍼드'가 리틀 야구 리그대회에서 눈에 띄게 활약하면서부터 균열이 생깁니다. 학부모와 지역 주민으로 이루어진 관객들은 제리의 뛰어난 실력에 환호보다는 경계의 눈빛을 보냅니다. 느덧 독자는 소수자(뱀파이어)가 누리는 일상의 안녕이 다수파(인간)의 기분에 종속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지요. 제리가 대회 규정에 어긋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끝내 맞닥뜨리 는 혐오는, 이 이야기 속 사회가 표면에 내세우는 것과 달리 고강도 차별을 일삼는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관객들은 경기장 속 단 한 명의 소수자인 제리 셰퍼드를 향해 소리 높여 외칩니다. "뱀파이어를 죽여라!", "말뚝을 박아 버려!", "'비정상(The Unnatural)'이 다시 일어나잖아!"


들이 모두 특별히 잔인하고 비정한 사람들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보다 그동안 형식적으로만 추구되어왔던 최소한의 정의가 무너졌다고 보는 게 맞겠죠. 이 작품은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이 집단의 광기에 매몰되어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의 포식자'라는 뱀파이어의 전형적인 장르 관습에서 벗어나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 커다란 장점이지요. 장르에서 자주 쓰이는 익숙한 소품이나 소재의 변주는 간혹 이전에 상상해보지 못했던 지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상상하지 못했던 지점이라고 해서 꼭 우리 눈에 낯설게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뱀파이어 유격수』에서 제리가 경험하는 차별은 독자가 사는 현실을 매우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지요.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2022년 한국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둘러싼 이슈를 살펴보면, 두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다수에 속한다'라는 자의식에는 어딘가 묘한 마력이 있어서,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만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해주겠다는 식의 해괴한 논리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결국 이번에도 역시 늘 해오던 이야기를 한 번 더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존재는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한 인간의 권리는 모든 인간의 편의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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