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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30. 2022

먼 과거, 또는 먼바다로부터 실려온 이야기

곽재식, 『고래 233마리』, 주니어김영사, 2022

* 쪽수: 212



청동기 시대, 한반도 남쪽의 진국(辰國)에 살았던 소년의 삶을 그린 동화입니다.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만으로 상당히 신선한 느낌을 주지요. 청동기 시대에 대한 지식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아무래도 대략적인 정보가 있다면 더 좋을 거예요. 책에는 그런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인 해설이 중간중간 아홉 차례에 걸쳐 실려 있습니다. 일종의 주석 같은 역할이죠. 어린이 독자에겐 역사적 배경이나 이야기에 반영된 과학적 설정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없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봅니다. 여기 실린 해설들은 스토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실용적이지 않고 내용도 대체로 흥미롭지 않아요.


실재했던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읽을 때, 알려진 역사가 이야기 속에 얼마나 정밀하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한 독자도 있을 거예요. 흔히 말하는 '고증'이라는 틀로만 시대물을 평가하는 독자도 있고요. 물론 고증이 곧 스토리텔링의 기반이 되는 작품들이 있어요. 켄 폴릿의 『거인들의 몰락Fall of Giants』(2010)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에 관한 고증이 어긋난다고 상상해보면 실감이 나죠. 좀 더 가깝게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어떤가요.


그런데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엄밀히 반영되는 비율은 작품마다 달라요. 많은 작가가 역사의 한두 줄에서 따온 아이디어를 스토리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다른 기록이나 사료는 종종 배제하곤 합니다. 필요 없기 때문이죠. 한윤섭의 『서찰을 전하는 아이』(2011)가 뛰어난 작품인 이유는 고증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21세기 어린이 독자에게 유의미한 메시지를 1880년대 조선으로부터 무사히 실어날랐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에서 고증은 적당히 무시되었고, 이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배유안의 『초정리 편지』(2006), 이현의 『나는 비단길로 간다』(2012), 김남중의 『첩자가 된 아이』(2012)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현길언의 『못자국』(2003)이 6.25 전쟁을 재현하는 정도와 뉘앙스는 권정생의 『몽실언니』(1984)와 많은 면에서 다르고,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동안 독자층의 성향이나 특징도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지금은 또 어떨까요. 제가 보기에 이 문제를 다루는 모범답안은 한윤섭의 『봉주르, 뚜르』(2010)에 실려 있습니다.


『고래 233마리』는 이런 사실들을 감안하고 봐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일단 여기서는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간섭할 여지가 현저히 줄어들어요. 선사시대니까요. 청동기 시대를 나타내는 단서는 대강의 실루엣만 잡아주고 있어서 구체적인 그림에 대한 자유도가 상대적으로 높죠. 그러고도 남는 빈틈은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으면 됩니다. 전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특별한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고래 233마리』의 줄거리는 시대만 다른 배경으로 한 뒤 그대로 갖다 옮겨도 무리 없이 작동할 겁니다. 주인공 소년 '바라래'는 뱃사람인 아버지의 고깃배가 폭풍으로 부서진 뒤 가족과 헤어져 '도한부인'의 노비가 됩니다. 바라래는 도한부인의 집에서 일하며 '지가노', '마하루', '수수안', '토랑'과 같은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노비 신세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함께 궁리하지요. 바라래는 배를 잘 다루고 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 그 기술을 이용하여 고래를 잡아 돈을 벌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일행을 꾸려 먼바다로 나가 마침내 고래 떼를 만나게 되지요. 밤바다를 비추는 은은한 달빛 아래, 바위처럼 가만히 떠오른 고래 떼를 마주치는 경험은 이런 동화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해볼 수 있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딜레마가 있지요. 바라래 일행은 고래를 잡으러 바다에 왔습니다. 조각배를 타고 큰 고래를 잡을 수는 없으니 새끼 고래라도 한 마리 잡아가야 값을 치르고 노비 신세를 면할 수 있습니다. 바라래와 고래 떼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이죠. 하지만 밤바다에서 고래 떼를 마주치는 아름다운 장면을 애써 연출해놓고 곧바로 그걸 망가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건 꼭 동화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앞길이 바다 같은 소년을 어느 집 노비로 계속 매어둔 채 이야기를 끝낼 수도 없고요. (모험기에서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다분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최근 개인으로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어린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는 동화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여성 주인공을 세우면 할 수 있는 얘기가 더 늘어나지요. 『고래 233마리』는 주인공이 여성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서브 에피소드 형식의 여성 서사가 짤막하게 등장합니다. 주인공의 적극적인 도전과 모험도 개연성 있게 잘 그려졌고요. 작가는 이 작품을 10년 전에 써두었다고 하는데, 어느 모로 보아도 지금 나온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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