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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23. 2022

또다시 새로워지는 이야기

태 켈러, 강나은,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돌베개, 2021

* 쪽수: 336



흔히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들 합니다만 사실이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사용되는 맥락도 자세히 뜯어보면 제각각이고요. '전통'과 '세계'라는 단어의 의미부터가 그렇죠. 애초에 우리는 그 둘을 명확히 가를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고유한 전통을 구성하는 요소로 여겨졌던 것들이 알고 보면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유사하게 형성되어왔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죠. 이야기의 영역으로 가면 더 그렇습니다. 한국의 옛이야기들은 결코 한국에만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보다 '더 한국적'이죠. 그런 이야기가 이른바 '세계적' 기준에 더 잘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맥락 위에서 시도되었을 때 비교적 새롭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이런 아이러니는 어느 정도 창작자와 수용자의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듯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는 완제품이라고 부르기 어려워요. 동시대의 독자와 어떤 관계를 구축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포지션과 의미가 새롭게 부여되곤 하니까요. 결국 어떤 작품의 정체성, 특히 지역이나 문화와 관련된 정체성을 논할 때 우리는 약간 싱거운 기준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여기에는 허점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허술함을 참아주기로 한다면, 꽤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렇다면 가장 한국적인 동시에 가장 세계적인 이야기란 과연 어떤 이야기일까요. 이윤하의 『나인폭스 갬빗』(2016), 이민진의 『파친코』(2017), 정이삭의 <미나리>(2020)와 같은 작품들은 모두 미국 사람이 만든 미국 작품이지만, 한국의 독자와 관객들은 이 안에서 모종의 한국적인 서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각각의 결은 완전히 다르겠지만요. 어쨌거나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 설화,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 1세대 이민자의 삶과 같은 소재는 한국만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들이 저마다 일정하게 한국의 역사와 정서, 모티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요. 나아가 바로 그 점이 이들을 다른 작품과 달라 보이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주로 수입에 의존해왔던 먼 곳의 이야기를 직접 선보이는 이런 흐름은 아마 앞으로 더 가속화되겠죠.


2021 뉴베리 메달 수상작,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When You Trap a Tiger』에서도 독자는 일련의 한국적 요소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작품에는 할머니와 호랑이가 각각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이 둘의 조합이 한국인에게 불러오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는 역시 「해와 달이 된 오누이」겠죠. 다여기서는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오누이가 아니라 자매로 바뀌는데, 그건 할머니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손녀들에게 맞추어서 바꾸어 들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람이 되려면 동굴에서 100일을 버텨야 한다는 한반도의 건국 신화 모티프가 잠깐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주인공 릴리가 한국인 이민자인 할머니를 'grandma'가 아니라 'halmoni'라 부르는 것에서도 이 작품의 아이디어 일부가 한국에서 왔음을 알 수 있죠.


이야기는 주인공 '릴리'와 언니 '샘'이 엄마 차를 타고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 위에서 시작됩니다. 엄마와 언니가 앞 좌석에서 말다툼을 하는 동안 릴리는 투명 인간처럼 자기 존재감을 지우는 초능력을 발휘하려 애씁니다. 그러다가 앞 차창 너머로 보이는 길 위에 커다란 호랑이를 발견하지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하던 호랑이를 실제로 보게 된 겁니다. 하지만 엄마와 언니의 눈에는 호랑이 보않습니다. 어째서 호랑이는 릴리의 눈에만 보이는 걸까요.


오래전 할머니는 손녀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기 전 별을 따는 시늉을 하게 했습니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별처럼 따오는 이 행위는 굉장히 낭만적이면서 한편으로 이 작품의 핵심 아이디어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별들은 모두 마법이 깃든 이야기로 만들어졌는데, 할머니가 그중 나쁜 이야기 일부호랑이한테서 쳐왔거예요. (간혹 밤하늘의 별을 따는 건 낭만적인 도둑질의 은유로 쓰이기도 하니까요.) 그때 빼앗겼던 이야기를 되찾기 위해 호랑이가 왔다는 것이죠. 이렇듯 이 작품은 이야기라는 테마 자체를 일종의 판타지 소품으로 활용하면서 흥미진진한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관계와 성장에 관한 고전적인 메시지를 풀어내죠.


할머니는 호랑이를 믿지 말라고 했지만 릴리는 아픈 할머니를 위해 호랑이와 거래를 하기로 합니다. 호랑이는 훔쳐간 이야기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할머니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호랑이를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는 릴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 집 지하실에 호랑이 덫을 설치하기로 하지요. 리고 그곳에서 호랑이를 만나 할머니가 훔친 이야기의 내용을 하나씩 듣게 됩니다. 이야기 속 또 다른 이야기의 결말은 무엇이며, 그를 통해 릴리와 가족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궁금증과 함께 풍겨오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이 새로운 작품 또다시 한국의 옛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건 아마도 꽤 특별한 경험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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