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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20. 2022

시대의 담론에 안주하는 태도

휴 로프팅, 『돌리틀 선생 항해기』, 지경사, 2012

* 쪽수: 185



『돌리틀 선생 항해기The Voyages of Doctor Dolittle』는 돌리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번째 작품인 『돌리틀 선생의 이야기The Story of Doctor Dolittle』가 발표된 해는 1920년이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22년에 '항해기'가 나왔죠. 오늘 소개할 책에는 '이야기'와 '항해기', 두 책의 에피소드가 나란히 들어 있습니다. 비중은 오히려 '이야기'쪽이 더 많네요. 그러니 제목도 '돌리틀 선생의 이야기'라고 짓는 게 더 합리적이었겠지만, 편집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항해기'라는 가슴 뛰는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지요.


전형적으로 20세기 초의 1세계 백인이 썼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21세기에 이 말은 당연히 칭찬이 아니지요. 작품 속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백인 우월주의와 나르시시즘, 나아가 서부개척시대에 대한 무의식적 향수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불쾌하다기보다 그냥 좀 웃겨요. 중간에 백인 패싱을 열망하는 흑인이 한 명 등장하는데(심지어 그는 아프리카 어느 왕국의 왕자입니다), 분위기를 감안한다 해도 이런 설정은 굳이 안 넣어도 됐거든요. 바꾸어 말하면, 이건 작가가 당시의 어린이 독자들(좀 더 구체적으로는 두 아들들)에게 단지 재미있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해서 넣은 플롯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대체로 맞았습니다. '항해기'는 1923년에 뉴베리 상을 수상했고, 수차례 영화와 애니메이션,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됐어요. 2020년에 개봉한 영화 <닥터 두리틀Dolittle>에서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인종차별적 요소는 전부 들어냈는데, 그러다 보니 별로 두리틀스럽지 않게 되어버렸죠. 톤의 차이는 있지만 에디 머피 주연의 1998년 영화 <닥터 두리틀Doctor Dolittle>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러니입니다.


한편으론 작가가 당시에 이런 차별적인 신념을 진지하게 고수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세계에 고스란히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에겐 판타지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할 때조차 넘어서지 못한―또는 넘어설 생각이 없는― 단단한 현실의 울타리가 존재했던 것이죠. 그는 인종차별을 극복해야 할 벽으로 인식하기보다 하나의 담론으로서 기꺼이 수용하는 길을 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저 단순한 놀이였을 수도 있고요. 아마 둘 다였겠죠.


그럼에도 21세기의 독자가 이 동화를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란 건 세상에 없으니까요), 추천은 해보고 싶어요. 우선 동물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인간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부터 매력적이고, 동물들에게 둘러싸여 살던 의사 '돌리틀'이 앵무새 '폴리네시아'에게 동물의 언어를 배워서 수의사가 되는 정도 재미있습니다. 아픈 동물을 치료하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 돌리틀 일행의 모험도 흥미진진하고요. (돌리틀과 동물들의 관계가 시혜와 보은이라는 일종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펼쳐지긴 하지만 그건 그렇게까지 거슬리는 문제는 아닙니다.) 동시대 담론에 안주하는 태도의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시대의 한계점 또한 가늠해보는 일도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 될 수 있겠죠. 어쨌거나 시대의 지평에 매여 사는 이들이 비단 창작자들 뿐만은 아닐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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