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Jun 05. 2022

틀에 갇힌 메시지를 읽는 일

강다민, 『당신의 기억을 팔겠습니까?』, 내일을여는책, 2020

* 쪽수: 144



책 내용을 본격적으로 리뷰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책 표지에는 '인권과 자본, 민영화의 그늘을 알려주는 동화'라는 홍보 문구가 달려 있어요. 이것만 없애도 훨씬 좋은 책이 됐을 겁니다. '인권과 자본, 민영화의 그늘'을 알고 싶으면 그냥 그런 지식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을 읽으면 됩니다. 유튜브를 뒤지거나 구글링을 해봐도 되고요. 물론 동화도 그런 주장을 담을 수는 있지만, 그걸 책 표지에까지 걸어두는 건 그다지 좋은 전략이 아니에요. 어린이 독자에게 진정성 있게 어필하는 방식도 아닐뿐더러, 이야기를 일차원적인 틀 안에 가둬두는 일이기도 하죠. 『긴긴밤』의 홍보 담당자가 책 표지에 '동물들이 지닌 불굴의 모험 정신을 알려주는 동화'와 같은 문구를 달아놓았다고 상상해보세요. 읽기도 전에 책이 얼마나 왜소해 보였겠어요.


이야기는 어두운 미로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민영이'는 길고양이 '밍밍이'의 사료값을 벌기 위해 미로 찾기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저로선 민영화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민영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회를 연 곳은 지역의 전기 사업을 독점하여 주민의 삶을 통제하는 '스타 그룹'이라는 기업입니다. 민영이는 지역의 안전을 저해하는 범죄자를 체포하는 미션을 수행하며 미로를 헤쳐나가지요. 알고 보니 미로 찾기 대회는 참가자의 사회적 공감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스타그룹이 설계한 디지털 시뮬레이션 장치였습니다. 민영이는 길고양이를 체포하는 미션과 가난한 환자를 외면하는 미션에 실패하고 대회에서 이탈합니다.


민영이가 타인과 동물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곧 스타 그룹의 눈에 띄게 됩니다. 스타 그룹은 이 지역에 화려한 '스타 시티'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계획을 원활히 추진하려면 주민들이 기업 방침에 불만을 갖지 않아야겠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을 기업의 정책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민영이 같은 시민은 기업 입장에선 걸림돌입니다. 결국 스타 그룹은 사람들의 뇌에 행복한 기억을 심어 불만을 갖지 못하도록 조작하는 일에 민영이를 끌어들이려 합니다. 이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민영이와 스타 그룹의 대립으로 전개되지요. 다만 문제는 중요한 장면에 이르기까지 불필요한 언급이 많아서 전개가 산만하고, 소재 간 충돌이 자주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컨대 이 작품은 생태주의와 공존말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아빠가 스타 시티 건설 반대 시위에 참여하겠다며 기운을 내기 위해 사 온 음식은 하필 순댓국이에요. 이 순댓국은 민영이가 죽은 엄마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엄마 역시 생전에 길고양이들을 보살폈다고 하고요. 하지만 길고양이의 생태에 관심을 두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가족이 행복하게 순댓국을 먹는 모습은 이상하고, 조금 기괴하기까지 하죠. (현실에선 그럴 수 있어요. 픽션에서는 아닙니다.) 여기에도 뭔가 의미심장한 서사가 있을까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아니었고요. 독자 입장에선 작가가 이 문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미스터리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하는데, 후반부에 드러나는 이 인물의 정체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라고는 하지만 하는 일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사에 가깝고요. 민영이와 과학자는 힘을 합쳐 스타 그룹의 계획을 저지하고 사람들의 빼앗겼던 기억을 되찾아옵니다. 그 과정에서 5.18과 세월호, 소녀상이 그야말로 스치듯 한 줄 언급되지요. 전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와도 맞지 않을뿐더러, 사안을 다루는 책임 있는 자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길고양이 문제도 그래요. 전 이 작품이 길고양이 살리기에 이렇게 많은 비중을 할애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인권과 자본, 민영화 이슈를 다루는 작품의 메시지가 전반적으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아마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다양한 소재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결코 행복했던 기억만으로 구성되지 않는― 인간 삶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같지만, 실은 판에 박힌 루트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죠. 독자를 계몽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서 이야기의 긴장감이나 굴곡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요. 이 책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장면에선 그에 대한 변론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어린이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고 사실도 아닙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가 감각하는 세계의 모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