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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n 11. 2022

흔들림 없는 지지와 믿음

임은하, 『복제인간 윤봉구』, 비룡소, 2017

* 쪽수: 172쪽



한국 동화를 읽을 때 자주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쓰는 말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 심지어 쓰지도 않는 말을 쓸 것이라고 가정하여 흉내 내는 것. 저는 이걸 '담탱이 효과'라고 멋대로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청소년 은어로서의 '담탱이'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잠깐 쓰이고 사라졌습니다. 그나마도 많이 퍼지진 못했고요. 별 매력 없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하이틴 드라마에서는 2010년대 후반까지도 종종 쓰였죠. 누군가는 이 말에서 매력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새롭게 발표되는 작품에서 '담탱이'를 목격하게 되는 날이 올까요. 알 수 없지만,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작품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낮아지는 독자도 있다는 것을 창작자들이 좀 알아주면 좋겠어요. 이렇게 작가가 상상으로 빚어낸 유치하고 작위적인 이미지를 밀어붙이느라 정작 독자의 동화적 체험을 소홀히 하는 경우, 저는 '담탱이 효과'가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당연히 '담탱이'라는 말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요. 실은 아주 많은 동화들이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요.


동화가 반드시 어린이와 청소년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게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작가가 어린이의 말을 쓰면 잘 써도 어색합니다. 그중 일부는 현실의 어린이가 쓰지 않는 말일 가능성이 높고요. 그러니 작가는 작가 자신의 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써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 독자의 현실을 가볍게 생각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겠죠.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동화는 동시대 어린이의 '언어'가 아니라 '욕망'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아쉽게도 이걸 혼동하는 작품이 아직까진 많이 보입니다. 조금 과장하면, 이것만 잘 이해해도 시장에서 금방 눈에 띌 정도예요. 생각해보세요. 상상 속 어린이의 언어로 어른의 잔소리를 하고 있는 작품들 사이에서, 정제된 언어로 어린이의 욕망을 드러내는 작품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질지.


이번에 소개할 작품 『복제인간 윤봉구』는 바로 그런 특별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12살 어린이의 1인칭 시점으로 쓰인 데다가 인물 간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히 높은데 표현과 메시지가 따로 논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요. 이야기는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린 주인공이 위기 속에서 자아를 직면하고 정체성을 세워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잘 짜인 SF 동화입니다. 복제인간 '윤봉구'는 자기 존재와 의미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집 '진짜루'입니다. 봉구는 짜장면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친구 '강소라'네 아빠가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조수로 일하며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봉구 앞으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듭니다. 편지에는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지요. '나는 네가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편지와 함께 이야기는 옅은 미스터리로 접어듭니다.


작품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발랄하고 경쾌하지만 봉구의 의문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이 담겨 있지요. 내가 누군가의 사본이라면―얄궂게도 봉구의 원본은 형 '민구'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원본과 사본,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어디에 세워져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세워지기보다 내가 스스로 세워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듯 이야기는 로봇, 인공지능, 복제인간과 같은 SF 소재에 익숙한 어린이 독자가 충분히 흥미롭게 여길 법한 생각거리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복제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다른 인간들과 아무것도 다를 바 없는 존재를 통해 굉장히 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복제인간 윤봉구』는 '진짜'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동화적으로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부으며 성장해나가는 봉구는 그것만으로 어린이 독자의 사랑과 응원을 한 몸에 받기 충분합니다. (주변의 어린이를 잘 관찰해보세요. 전부 좋아하고 의미 있는 일에 뛰어들지 못해 안달 난 친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 작품은 어린이의 욕망을 유의미하게 담아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봉구가 원본인지 사본인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가 되지요. 때문에 봉구가 어떤 혼란을 겪든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봉구를 지지하게 됩니다. 알다시피 이 정도의 믿음을 체험해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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