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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un 26. 2022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말하기

김혜온, 『바람을 가르다』, 샘터, 2017

* 쪽수: 104



김혜온의 『바람을 가르다』는 장애에 초점을 둔 이야기 세 편이 실려 있는 동화집입니다. 작품의 제목은 실린 순서대로 「바람을 가르다」, 「천둥 번개는 그쳐요?」, 「해가 서쪽에서 뜬 날」이고요. 장애를 다루는 태도와 메시지는 대체로 일관되지만 구체적인 방식에서는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이 차이는 본질적으로 주인공 캐릭터와 장애 간의 거리에서 기인하는 듯하지요.


「바람을 가르다」에서는 주인공 '박찬우' 본인이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천둥 번개는 그쳐요?」의 주인공 '해미'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오빠가 있고요. 「해가 서쪽에서 뜬 날」의 주인공 '마 선생'은 자폐 성향을 가진 '이유빈'의 담임교사입니다. 당연히 이 세 인물이 경험하는 장애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죠. 앞의 두 이야기는 주인공이 1인칭 서술자로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도 그런 거리감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표제작 「바람을 가르다」의 주인공 찬우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는 짝꿍의 도움을 받으면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바뀐 짝꿍 '용재'는 어쩐지 이전 짝꿍들다르게 느껴집니다. 찬우를 대하는 말과 행동이 거칠고 조심성이 없죠. 물론 용재는 나쁜 친구가 아닙니다. 그저 찬우를 다른 친구와 다르게 대할 이유를 알지 못할 뿐이죠. 용재 눈에 찬우는 걷기와 말하기에 조금 불편을 겪고 있는 평범한 친구입니다. 그런 찬우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마도 '도우미'가 아닌 '친구'일 것이고, 그런 점에서 용재는 좋은 친구죠. 용재는 바람을 가르며 달고 싶다는 찬우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려보기로 합니다. 이야기는 두 어린이가 장애인과 도우미라는 형식적 관계에만 집중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장면을 인상 깊게 묘사하며 장애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돌아보게 합니다.


「천둥 번개는 그쳐요?」의 주인공 해미에게 오빠는 소중한 가족이면서 동시에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실은 아주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족에게 이런 양가감정을 품고 살아가지요. 오빠를 혼자 두고 외출했다가 위험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는 해미는 어지간해선 오빠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매일 오빠의 하교 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가서 복지관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해미의 이죠. 해미는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오빠를 돌보며 살아야 하는 걸까?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선뜻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지요.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힘들어하는 해미의 감정을 응시하고 수용하며 다독여줍니다. 이러한 위로가 언제나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이야기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해가 서쪽에서 뜬 날」의 마 선생은 자기만 보면 자지러질 듯 우는 유빈이에게 분노와 무력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점점 유빈이를 이해하게 되면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지요. 즉, 여기에서 극적으로 바뀌는 인물은 어른인 마 선생뿐입니다. 어린이들은 시종일관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지요. 이 메시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의 주변에 항상 감정을 받아줄 여유가 있는 성숙한 어른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장애를 지닌 어린이의 곁에는 감정적으로 다 소진되어버린 어른이 있고, 더 나아가 나쁜 어른이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단 한 사람이라도 어린이의 주변에서 믿을만한 버팀목이 되어주려 노력해야겠죠. 그것이 비록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기적을 요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장애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것을 기존의 편견대로 극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이 어린이 독자가 장애를 둘러싼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하나의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표제작 「바람을 가르다」가 특히 그렇죠. (다른 두 작품에 비해 뛰어나기도 하고요.) 독자는 그동안 '장애'라는 두 글자에 끼워 맞추어진 편견을 어떻게 직면하고 바꾸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고민이 대개 그렇듯 정답을 찾지 못한 채로 계속 이어지겠죠. 결국 모두가 각자의 삶과 실천으로 조금씩 깨달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사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아요. 예를 들어 이야기 속 찬우와 용재의 관계가 이상적이었다고 해서 모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환원할 수는 없는 거예요. 중요한 건 매 순간 혼란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개인들의 노력이지요. 그 노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결코 편하고 유쾌하지는 않을 겁니다. 진보란, 개인들의 주관적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일 이상의 가치 있는 무언가 이니까요. 모든 변화는 불쾌한 공론장에 첫발을 딛는 실천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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