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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ug 03. 2022

어린이 디스토피아에 관한 아쉬운 상상

알렉스 쉬어러, 『아이를 빌려드립니다』, 미래인, 2019

* 쪽수: 284



현실의 요소 몇 가지를 변형함으로써 달라지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외삽Extrapolation'은 SF에서 세계관을 구축할 때 자주 사용되는 기법의 하나입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 알렉스 쉬어러Alex Shearer의 『아이를 빌려드립니다The Hunted』는 그런 외삽을 통한 발상이 주요하게 작동하는 SF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의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40살 전후에 노화방지 약을 먹고 그 모습 그대로 200살 무렵까지 삽니다. 그와 동시에 원인 불명의 불임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생아가 극도로 희귀해집니다. 길에서 어린아이가 보이면 일제히 쳐다보면서 수군거릴 정도지요. 심지어 이곳은 혼자 다니는 아이를 유괴하여 돈을 받고 파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계입니다.


이곳에서 아동노동은 돈벌이 수단의 하나로 인식됩니다. 아이들은 무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아기를 갖고 싶어 하는 부부의 집에 잠시 임대되어 좋은 아들, 딸을 연기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원히 어린이로 남아 돈을 벌 수 있도록 피피(PP, Peter Pan) 시술을 받기도 하지요. 전 이게 좀 이상합니다. 이 세계의 정상적인 어른들은 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의학기술의 발전과 불임화 현상이 어른들의 변태적인 취향을 충족시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처음부터 배경 설정, 즉 외삽이 잘못된 것이죠.


이곳의 어른들은 모르는 아이를 한두 시간씩 빌려서 애완동물로 소비합니다. 아이가 자신을 엄마 아빠라고 불러주거나 제 손을 잡아주길 슬며시 바라면서요. 그들도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속으론 알고 있지만,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는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의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서 멀쩡하게 굴러가던 윤리 규범까지 이유 없이 무너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를 설명해줄 만한 추가적인 장치나 설정이 필요한데 이 작품은 그걸 그냥 뭉개고 지나갑니다. 굉장히 헐렁하고 안일한 방식이죠.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여성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1985)를 보면 불임 사회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묘사함에 있어 굉장히 치밀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곳에선 개신교 근본주의와 남성 우월주의가 세계를 장악한 채 여성들에게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강요합니다. 그 세계에 속한 인물들이 특정한 행위 패턴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두 이 기본 도식 안에서 이해되지요. 결국 배경이 되는 세계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과 다른 방식으로 일그러져 있다면, 그렇게 된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겁니다.


한편 이 작품에선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 건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생물학적 성장과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메시지인데 굉장히 자주, 반복적으로 강조되지요. 후반부에 가면 이제 알았으니까 그만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캐릭터 설정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이 경우에는 그냥 작가의 습관이 아닌가 싶어요. 핵심 메시지를 몇 번이고 강조함으로써 오독의 여지를 줄이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여기선 보여주기보다 설명하기의 비중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 이야기는 정작 꼭 필요한 설명은 빼놓고 서사를 전개해나가고 있거든요. 아쉬운 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서술 트릭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반칙이에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테니 밝히지 않겠지만, 중간중간 계속 붙여왔던 라벨을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 양 떼어버리면 안 되지요. 독자는 막판의 반전에서 오는 쾌감보다 무언가 공정하지 못한 게임에 응했다는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결말이 아니에요.


이밖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여럿 보이는 아쉬운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이 디스토피아를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상상하여 그려낸 점만은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화가 종종 어린이 주인공에게 결핍과 시련을 주는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어린이에게 적대적인 세계를 규모 있게 펼쳐 보인 점은 이 이야기가 본격적인 장르물로서 기존의 문법에서 한 발 나아가 더욱 과감한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려 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알다시피 좋은 작품은 이런 적극적인 시도들이 모이고 모여 완성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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