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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25. 2022

세대를 가로질러 흐르는 기억

에린 엔트라다 켈리, 『우리는 우주를 꿈꾼다』, 밝은미래, 2021

* 쪽수: 376



에린 엔트라다 켈리Erin Entrada Kelly의 동화는 국내에 세 작품이 번역되어 있고, 셋 다 엄청나게 좋습니다. 오늘은 그중 2021년 뉴베리 아너상을 수상한 『우리는 우주를 꿈꾼다We Dream of Space』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품의 배경입니다. 이 책이 미국에서 발표된 해는 2020년인데 이야기는 1986년 1월을 배경으로 펼쳐지거든요. 시간 배경으로만 본다면 이건 동시대의 이야기도 아니고,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고,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에요. 1977년에 태어난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죠. 그래선지 이 작품은 어머니가 딸에게 들려주는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작중 시간 배경으로 일기처럼 하는 경우는 동화에서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어쨌든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이고, 잘못하면 '라떼 이야기'가 될 위험도 있으니까요. 차라리 먼 과거의 알려진 역사를 배경으로 삼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한 전략이지요. (물론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건 그럼에도 작가가 자신의 성장기를 작중 배경으로 골랐다면 거기에는 어떤 강렬한 기억이 박혀 있을 겁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고유한 기억이면서, 동시에 한 세대 전체를 가로질러 각인된 기억이기도 할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그 공유된 기억에 관한 이야기 더 이상 개인의 것일 수많은 없죠. 이렇듯 한 사람의 기억은 간혹 짙은 역사성을 띠면서 이야기로 재탄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주를 꿈꾼다』에서 핵심 모티프가 되는 역사적 기억은 1986년 1월 28일에 있었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공중 폭발 사고입니다. 당시 챌린저 호는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후 73초 만에 대서양 위에서 폭발했고, 이 사고로 선내에 있던 일곱 명의 대원이 전원 사망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보도채널 CNN이 발사 장면을 TV 생중계로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실시간으로 목격했습니다. 지금까지도 NASA 창립 이래 가장 끔찍했던 참사로 기억되는 사고입니다.


챌린저 호의 발사는 당시 미 전역의 수많은 초중고등학교에도 스크린을 통해 생중계되었다고 합니다. NASA는 민간인 교사가 우주로 나가 원격으로 과학 실험 수업을 진행한다는 '우주 교사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었거든요. 자연히 학교 일선의 관심과 기대도 높아졌겠지요. 최초의 우주 교사로는 '크리스타 매콜리프'라는 고등학교 교사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되었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꿈꾼다』는 이렇듯 고조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캐시', '피치', '버드'라는 이름의 삼 남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캐시와 피치는 남자고 버드는 여자예요. 피치와 버드는 쌍둥이고요. 맏이 캐시는 농구를 좋아하지만 소질은 없습니다. 지난 학기에 진급을 못해서 중학교 2학년을 한 번 더 다니고 있지요. 피치는 오락실 게임을 좋아하고 가끔 화가 불같이 올라오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어맨다'라는 덩치 큰 여자아이가 호감을 표시해 오는 것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요. 그리고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버드입니다. 버드는 NASA 최초의 여성 우주선 사령관을 꿈꾸는 열렬한 과학도입니다. 버드는 자신의 우상인 주디스 레스닉이 탑승한 챌린저 호의 발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캐시, 피치, 버드는 모두 평범하고, 동시에 모두 특별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얘기죠. 어쨌거나 이들은 주인공이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평범한 인물들이 특별해지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동화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되는 것으로 바꾸어내는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말이 되는 것을 더욱 설득력 있는 무언가로 바꾸어내는 기술이거나요. 그런데 여기선 그게 조금 다르게 나타납니다. 처음에 캐시, 피치, 버드는 그저 평범하고 고만고만한 그 나이 또래의 중학생들입니다. 그들은 각자의 일상에서 정말로 있음직한 크기의 갈등과 불행을 경험하며 살아가지요. 결말 직전까지 이야기는 말이 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고, 그래서 감정 이입이 더욱 원활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에 정말로 거대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 비현실적인 비극 이후 이들 삼 남매 또한 이전과는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이 이야기의 결말은 버드에게 불가역적인 상흔을 남깁니다. 한 사람의 우주가 무너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은 정말로 가슴 아프고, 그러면서도 이게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품게 지요.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버드가 챌린저 호의 비극에 깊이 공명하고 슬퍼하고 여운을 남기고 끝내 감동을 안겨주는 것. 저에겐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전까지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말이 안 되는 상황으로 재탄생하는 것이죠. 때때로 현실은 이렇게나 비정하고, 그러면서도 처연하게 아름답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어느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덮고 나면 무언가 우주적인 실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인공 가족은 처음에 서로 접점이 없는 궤도를 떠도는 외로운 행성들 같아요. 하지만 뒤로 가면 어느새 나란히 동행하며 가족이라는 우주의 한 귀퉁이를 은은히 밝히고 있죠. 한 인간의 실존이 곧 하나의 우주와 같다는 아이디어는 작가의 전작 『안녕, 우주Hello, Universe』에서도 이미 만나보았던 개념이기도 해서요. 『안녕, 우주』를 인상 깊게 읽었던 독자라면 이번 작품에서도 실망할 일은 정말로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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