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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16. 2022

SF 세계로 가는 문

로이스 로리, 『기억 전달자』, 비룡소, 2007

* 쪽수: 310



오늘 소개할 작품은 1993년에 발표되어 다음 해에 뉴베리 메달을 수상한 로이스 로리Lois Lowry의 디스토피아 SF, 『기억 전달자The Giver』입니다. 이 작품에서 디스토피아를 떠받치는 핵심 아이디어는 '늘 같음 상태Sameness'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불행은 다름으로부터 기인한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권력을 독점한 체제의 감시와 규율 아래 모든 개인이 규격화, 획일화되어 살아가지요.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과거의 인류가 쌓아온 모든 행복과 불행에 관한 기억을 지운 채 살아갑니다. 공동체의 규율에 반하거나 필요 없다고 판단된 인간은 '임무 해제'를 당하게 되고요. 임무 해제의 구체적 의미는 이야기의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이제 우린 이 정도는 바로 눈치챌 만큼은 장르 규칙에 익숙하지요. 간결하고 효율적인 설정입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가정이 있습니다. 일단 이곳에서는 원칙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배고파서 굶어 죽겠다' 정도의 표현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든 자원이 엄격하게 관리되는 공동체에서 굶어 죽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니 거짓말할 의도가 전혀 없더라도 언어 사용에 있어선 강박에 가까울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요. 그리고 색깔과 음악에 관한 가정도 재미있어요. 이야기 속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을 통제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 보이는 풍경과 귀에 들리는 소리에는 인간의 미감을 자극할 수 있는 요소들이 소거되어 있어요. 그 결과 사람들은 모두 무채색의 풍경, 통제된 날씨, 규칙적인 안내 방송과 같이 건조한 감각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 '조너스'는 사물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따금 색깔을 인식하지요. 그리고 이 능력이 조너스에게 '기억 보유자The Receiver'라는 특별한 직위를 부여합니다.


기억 보유자는 공동체 안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직위입니다. 조너스가 기억 보유자로 선택된 순간부터 전대 기억 보유자는 '기억 전달자The Giver'가 되지요. 수염 난 노인으로 묘사되는 기억 전달자는 인류가 지워버린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임무는 자신이 가진 인류의 기억을 다음 기억 보유자에게 빠짐없이 전수하는 것입니다. 노인은 조너스의 등에 손을 얹고 인류의 기억과 그 순간의 감각들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 진실을 마주한 뒤 충격에 빠진 조너스는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하지요.


장르물에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어린이·청소년 독자가 읽으면 좋을 작품입니다. (성욕에 관한 짧은 묘사가 있지만 디스토피아의 톤에 맞추어 섬세하게 절제되어 있습니다.) 어린이·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SF는 종종 장르 세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데 —잘 쓰인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기억 전달자』는 매우 좋은 작품입니다. 장르적인 클리셰가 세련되면서도 친절하게 녹아들어 있어서 가독성이 높습니다.


사실 전 SF를 대상 연령에 따라 성인 SF와 어린이·청소년 SF로 나누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SF의 장르적 특징을 논의함에 있어 독자의 나이는 별로 중요한 변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예컨대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The Door into Summer』(원픽입니다. 이 글의 제목도 여기서 가져왔지요.)이나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Have Space Suit—Will Travel』과 같은 작품들은 나이 불문하고 언제 어느 때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이에 따른 구분이 필요한 경우도 있죠. 얼마 전 리버스 솔로몬의 『떠도는 별의 유령들An Unkindness of Ghosts』을 읽었는데, 흥미롭게 읽었지만 SF의 고전적인 아이디어와 장르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추천하기는 망설여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이걸 읽고 재미를 느끼려면 이전부터 차근차근 읽어온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더 쉽고 친절하면서도 SF의 장점과 매력을 한껏 드러내는 그런 작품들 말입니다. 전 『기억 전달자』가 바로 그런 보석 같은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동화에도 그런 친절한 작품들이 좀 있는데, 첫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은 역시 이현의 『로봇의 별』(2010)입니다.


『기억 전달자』는 2014년에 동명의 영화로도 개봉했습니다. 한국에선 <더 기버: 기억전달자>라는 타이틀로 개봉했는데, 영화 자체는 평이합니다. 1993년 소설이 2014년에야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그럴 만하죠. 그동안 많은 장르 규칙과 트릭이 닳아서 무뎌졌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이 영화는 흑백으로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컬러풀해집니다. 조너스의 사물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죠. 그런데 원작 소설에서는 이들이 보는 세계가 흑백이었다는 사실이 중반부에 가서야 드러납니다. 즉, 매체 특성에 따라 내러티브 자체가 달라지는 거예요. 『기억 전달자』 고유의 매력은 당연히 소설에서 더 빛납니다. 영화는 그걸 다 담기엔 한계가 있죠.


SF의 장르적 특성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오슨 스콧 카드는 『How to Write Science Fiction and Fantasy』라는 작법서―우리나라에는 『당신도 해리포터를 쓸 수 있다』라는 약간 민망한 제목으로 바뀌어 들어왔지요―에서, SF&F가 중요하게 취급하는 네 가지 요소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MICE, 곧 환경(Milieu), 착상(Idea), 인물(Character), 사건(Event)인데, 당연히 각 요소는 작품마다 서로 다른 비중으로 다루어집니다. 또한 MICE는 독자의 취향을 분류하는 기준으로도 흥미롭게 쓰일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착상과 인물의 개성을 중요하게 보는 독자인 것 같아요.


『기억 전달자』는 그중 환경(M)과 착상(I)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디스토피아가 향하는 메시지의 초점도 분명하지요. 순수함에 대한 집착은 자주 폭력으로 번집니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이들은 그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가 오염되는 것을 병적으로 혐오합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말끔한 해법을 외치는 주류 집단의 정치 성향이 매우 폭력적인 것은, 이상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이 맥락에서 순수함을 예찬하는 모든 행위는 폭력이지요. 결국 문화적으로 주목할 만한 업적은 언제나 오염에 대한 관용에서 옵니다. 그것은 조화이고, 어울림이며, 서로 다름에 대한 품위 있는 존중이지요. 『기억 전달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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