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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07. 2022

담장 밖 괴물과 나

데이빗 월리엄스, 『드레스 입은 스트라이커』, 을파소, 2011

* 쪽수: 216



2017년 한 공익광고가 예외적으로 화제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고객센터 전화상담원이 겪는 고충을 개선하기 위한 실험적 기획이었지요. '상담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슬로건이 핵심이었는데, 전 보자마자 좀 의아했어요. 첫째는 저걸 굳이 말로 해야만 폭언과 욕설을 자제할 수 있는 어떤 빈약한 인간의 상상력에 대한 의구심이었습니다. 둘째는 상담원이 설령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 아닐지라도 그게 폭언과 욕설을 참고 견뎌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보편 상식이 통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네.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는 거 맞습니다. 전 사회가 무심하게 던지는 말 하나하나에 보다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광고에 따르면 실험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상담원의 가족이 녹음한 메시지를 통화연결음으로 설정해놓으니 고객들의 톤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이죠. 아무리 기분 나빠도 "착하고 성실한 제 딸이 상담드릴 거예요."라는 말을 듣고 폭언을 내뱉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겠죠. 결국 긍정적 변화 효과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런 기획을 보다 발전시켜나갈 필요도 있다는 데에 일부 동의합니다. 사회의 규범이라는 것이 예민한 사람들의 주관적 윤리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전 여전히 불만입니다. 우리는 가상의 당사자성에 기대지 않고도 약자의 권리와 삶에 대해 더 건설적인 논의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해요. '나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일'라는 전제 하에 행동하는(또는 베푸는) 양심이란 게 정말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5년 전, 10년 전에서 크게 나아진 게 없어요. 우리 주변에 다양한 약자와 소수자가 있고, 그들의 권리를 아무 조건 없이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어야 할까요.


혐오와 차별의 강도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 담장의 높이에 비례합니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담장 너머에 '우리'와 한 편이 될 수 없는 '그들'의 존재를 세워두는 순간부터 혐오는 시작됩니다. 그럴 때 담장 너머 타인의 개성은 납작하게 짓눌려서 보이지 않게 되지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혐오는 적대와 소모적 갈등을 낳습니다. 예컨대 호모포비아들 대부분은 호모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정보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호모란 그저 '담장 밖 괴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혐오하는 주체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죠. 결국 일말의 인간적 관점이라도 유지한다면, 호모포비아는 절대로 될 수 없어요.


이번에 소개할 데이빗 월리엄스David Walliams의 동화 『드레스 입은 스트라이커The Boy In The Dress』는 소수자성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데니스'는 퀴어한 취미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아이입니다. 아마 혐오의 담장 안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듣고도 데니스에 대한 판단이 끝나버릴 거예요. 더 알아볼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다름의 발견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이래요.


Dennis was different. 데니스는 달랐다.


이 작품에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핵심 요소는 데니스의 '다름'입니다. 물론 모든 동화 속 주인공이 특별하지만, 데니스의 특별함은 남과 다르다는(queer)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어느 날 '리사'네 집에 놀러 간 데니스는 자신이 아름다운 드레스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방문에서 데니스는 리사의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화장을 하며 기뻐합니다. 취향이나 욕망은 경험 이후에 발견되지요.


한편 데니스는 다분히 남성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아빠, 형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소년입니다. 2년 전에 집을 나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고, 또래 남자아이 '다베시'와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지요. 학교 축구팀에서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이고, '트리샤'라는 여성 MC가 진행하는 TV 토크쇼를 가장 좋아합니다. 즉 마이너한 욕망을 지녔다고 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마이너한 것들로만 빈틈없이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도입부부터 데니스라는 한 명의 인격체를 입체적으로 스케치해냅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혐오의 담장을 낮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담장 밖 괴물로 여겨졌던 존재도 알고 보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죠.


다음 날 데니스는 리사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 차림으로 외출합니다. 리사는 화장한 데니스를 프랑스에서 온 교환학생 '드니즈'라 소개합니다. 평소에 데니스를 알고 지내던 동네 사람들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지요.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두 친구는 다음 날 교환학생 드니즈를 학교에 데려갑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로 인해 드니즈의 비밀은 탄로 나 버리고 교장 선생님은 데니스를 퇴학시킵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뒤로 갈수록 아쉬운 점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 이야기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그렇죠. 실은 교장 선생님도 데니스와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 소수자였던 거예요. 결말부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리사와 데니스는 엉뚱하게도 그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서 교장 선생님을 협박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비밀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데니스의 복학을 허락하지요. 진정성 없는 결말로 느껴졌어요. 이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음지에 머물러야 하는 걸까요.


이 작품의 한국어 제목은 '드레스 입은 스트라이커'이고 원제는 'The Boy In The Dress'입니다. 원작이 영국에서 발표된 건 2008년이고 한국에 수입된 해는 2011년이니 시기적으로는 비슷하지요. 그런데도 'Boy'가 '스트라이커'로 바뀌어 들어와야 했던 건, 우리 사회 특유의 보수성 때문이었을 겁니다. 전 이 작품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퀴어한 정체성을 가진 남자아이의 이야기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축구를 사랑하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했죠. 그만큼 '드레스 입은 소년'과 '드레스 입은 스트라이커'는 메시지의 초점 비율이 완전히 다른 제목입니다. 당연히 전자가 더 좋은 제목인데, 수입 과정에서 리스크 요인이 중요하게 고려된 것 같지요.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요. 글쎄요. 앞서 말했듯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10년 전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늘 그래 왔듯 결국에는 옳은 방향으로 가겠죠. 지금의 나는 과연 긴 역사의 길 위에서 옳은 쪽에 서있는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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