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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29. 2022

학교라는 낭만

오카다 준, 『밤의 초등학교에서』, 국민서관, 2013

* 쪽수: 136



어린이가 좋아하는 이야기 장르에서 학교 괴담은 빼놓을 수 없는 위상을 차지합니다. 그중 어떤 이야기들은 지역 불문하고 거의 똑같은 버전으로 전해 내려오며 꽤 유서 깊은 전통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마다 동상 두 개 정도는 기본으로 세워두던 시절, 학교 괴담의 단골 소재는 단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혈투였습니다. 또 학교 터가 예전에는 공동묘지였어서 지금도 지하실에 가면 땅속에 묻힌 귀신들이 나온다는 얘기도 흔했고요. 그밖에도 과학실 인체 모형이 밤마다 복도를 돌아다닌다거나, 텅 빈 음악실의 피아노에서 오싹한 음악이 연주된다거나, 자정에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중앙에 앉아 무슨무슨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전설까지, 하여간 소재는 무궁무진했지요. 전 이게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학교 괴담의 저력은 아직까지는 건재한 모양입니다. 올해도 몇 어린이가 저에게 신나게 학교 괴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죄 익숙하고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었지요. 마침내 동상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전 그게 진짜냐며 놀라는 시늉을 하고는 몸을 약간 움츠렸습니다. 너무 호들갑을 떨면 어설픈 연기가 탄로 날까 봐서요. 간혹 어린이가 학교 괴담을 늘어놓을 때 '그거 우리 때도 있었던 얘기'라며 흥을 깨뜨리는 빌런도 있다던데, 매너가 아닙니다. 어린이가 이야기의 스릴을 최대한 즐길 수 있게 해 주세요.


오늘 소개할 오카다 준의 『밤의 초등학교에서夜の小學校で』는 낭만적으로 변주된 학교 괴담입니다. 일단 제목이 너무 좋지요. 어린이 독자에게 밤의 초등학교란 그야말로 환상적인 미스터리입니다. 으스스한 이야기의 배경으로 이보다 더 매력적인 공간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린이 독자들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기대할까요. 확실한 것은 이 작품이 제목만 가지고도 어린이 독자의 긴장과 호기심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고전적인 느낌의 호러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펼쳐 들었다면 조금은 실망하게 될 수도 있어요. 이건 그렇게 으스스한 방식으로 공포감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대신 오카다 준은 어느 초등학교에 찾아오는 밤 풍경을 놀랍도록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 작품의 가장 탁월한 지점이지요. 『밤의 초등학교에서』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학교 괴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가능하면 좀 느리게 읽는 게 좋습니다. 마치 그림을 한 점 한 점 감상하듯이요.) 매년 되풀이되어 온 익숙한 괴담을 계속 이어서 즐기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은 이처럼 낭만으로 가득한 학교의 밤에 다녀오는 것도 근사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일지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주인공인 서술자가 '어린벚잎 초등학교'의 새 야간 경비 일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처음 근무를 서는 날 주인공은 앉은키가 학교 건물 옥상까지 닿는 거인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떤 날에는 토끼가 숙직실에 찾아와 수프를 끓여주고, 또 다른 날에는 라쿤이 와서 머리를 감겨 주지요. 동화에나 나올 법한 마법사 할머니도 만나고 브레멘 음악대를 따라 도서관의 이야기책 속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한밤 중 학교 수영장에 들어가 헤엄을 치는가 하면 텅 빈 운동장을 혼자서 달리다 어릴 적 운동회의 추억에 잠겨보기도 하지요. 일지에 따르면 매일 밤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기이하고도 낭만적인 사건은 모두 밤에만 일어납니다. 그 일들은 굉장히 신비롭고, 아기자기하고, 밤공기처럼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온기로 가득하지요.


오카다 준은 초등학교 미술 교사로 오랜 기간 근무했습니다. 『밤의 초등학교에서』는 그런 그가 학교에 대한 오랜 애정을 꾹꾹 눌러 담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학교는 그동안 수많은 동화의 배경으로 묵묵히 쓰여왔어요. 때때로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인물과 사건들이 그 안에서 빛을 발하곤 했지요. 하지만 학교라는 공간 자체를 이토록 아름다운 무언가로 빚어낸 작품이 얼마나 있던가요. 학교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작가라면 이 책을 꼭 한 번이라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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