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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09. 2022

학교형 인간에 대한 단상

송미경,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웅진주니어, 2010

* 쪽수: 144



부정적 현실에 싫증을 내던 주인공이 그토록 원하던 유토피아에 갑니다. 유토피아는 처음에 완벽해 보이지만 주인공은 그 안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점점 현실을 그리워합니다.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은 자기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성장합니다.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그의 저서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에서 '집 → 집에서 떠남 → 모험 → 집으로 돌아옴'의 형태로 도식화되는 이러한 형태의 서사를 가장 전통적인 내러티브 플롯이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송미경의 데뷔작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니콜라예바의 표현대로라면 '가장 전통적인 내러티브 플롯'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008년에 제2회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수상했고요. 이 상은 좀 특이하게도 6회 공모전 이전에 상을 받은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판사 홈페이지에도 없어요.


이야기는 몇 가지 간단한 설정 위에서 전개됩니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의 배경은 학교입니다.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조금 특별한 기숙학교지요. 이름만 학교일 뿐 실제로는 놀이공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선생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습니다. 지각은 필수에 숙제는 없고 급식 시간도 없습니다. 대신 원하는 간식을 언제든 마음껏 먹을 수 있지요. 단, 이곳에서 적용되는 가장 엄격한 규칙이 하나 있는데 바로 친구와 깊이 사귀지 않는 것입니다. 한 친구와 30분 이상 함께 시간을 보내면 손목에 찬 시계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1시간이 넘으면 다시는 같이 놀 수 없게 됩니다.


주인공 '윤시원'은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학교의 본질을 뭐라고 생각하든, 많은 어린이 독자에게 현실의 학교는 그저 따분한 공간이니까요. 시원이가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지 구구절절 설명 안 해도 이미 독자는 주인공에게 공감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짧은 도입부 이후 곧바로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장소를 옮겨 그곳의 인물들을 소개하지요. 생략할 것을 과감하게 생략한, 영리한 도입부입니다.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부릅니다. 시원이가 만난 친구들은 각자 자신을 원숭이, 생쥐, 독수리, 숲, 덜렁이, 무지개, 하늘 여행가로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은 물론 각각의 캐릭터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키워드 구실도 하지요. 시원이는 자기 이름을 '게임기'라고 짓습니다.


시원이는 친구들을 차례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이 학교가 그렇게 이상적인 곳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탈출을 준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선 친구와 마음대로 사귈 수도 없고, 기숙학교라서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니까요. 이해는 가지만 현실의 학교를 옹호할 근거로 쓰긴 빈약해 보이죠. 요컨대 여기서 시원이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가족과 친구일 뿐 학교는 아닙니다. 하긴, 어린이 주인공이 학교 그 자체를 그리워하게 만들기란 얼마나 어렵겠어요. 이야기가 그걸 해낼 수 있으려면 먼저 현실의 학교가 더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설득력이 없어요.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공부 잘하고 실기도 잘하고 외모도 좋고 성격도 좋고 성실하고 자신감도 넘치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은 팔방미인 같은 친구가 해마다 한두 명 정도는 꾸준히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땐 그 친구 마냥 부러웠고 조금 더 커서는 뭔가 불공평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글쎄요. 그냥 그들이 일종의 '학교형 인간'이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모든 걸 다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중 자기한테 맞는 한두 가지, 많아봐야 서너 가지 재능을 붙잡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 친구들에겐 '학교'라는 재능이 있었던 겁니다. 그 재능을 못 가졌다고 해서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느냐. 그럴 리 없죠. 어떤 재능은 학교라는 보수적인 틀 안에서 결코 발현되지 않습니다. 실은 당연한 얘기인데, 많은 어린이들이 그걸 모른 채 학교에 다닙니다. 나는 학교가 싫어, 나는 잘하는 게 없어, 스스로 되뇌면서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 시원이도 아마 그런 어린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시원이의 학교 생활은 그리 나아질 게 없을 겁니다. 현실의 학교는 여전히 '학교 가기 좋아하는 아이들만을 위한 학교'일 테니까요. 그래서 학교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학교라는 재능'이 없는 아이도 싫어하지 않을 수 있는 학교가 현실에 있어야 이런 이야기들도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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