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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17. 2022

삶의 비극과 이야기의 방향성

나혜림, 『클로버』, 창비, 2022

* 쪽수: 212



최근 한 세미나에서 '재현의 윤리'에 관한 논의를 짧게나마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는 어린이·청소년 문학이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어떻게, 얼마나 반영해야 하며, 또한 그로부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린이·청소년 문학을 넘어 문학 일반에 꾸준히 제기되어 온 단골 의제이기도 하지요.


이런 주제가 나오면 저마다 떠올리는 작가와 작품이 다를 겁니다. 전 가장 먼저 구병모와 김중미가 떠오릅니다. 손원평의 『아몬드』도 생각나고요. 그다음에 에린 엔트라다 켈리의 『우리는 우주를 꿈꾼다』, 남유하의 『나무가 된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면, 2022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만 해도 그렇지요. 『사건』을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건 차라리 두려움이나 공포에 가까운 경험이었습니다.


문학이 삶의 비극을 다루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도 하고, 보다 깊고 내밀한 고통을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하지요. 동화적 장치에 빗대어 우회하는 방식도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회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풍자함으로써 아예 힘을 빼버릴 수도 있습니다. 최근 한국 SF에 그런 작품들이 꽤 많지요. 풍자와 해학은 지금도 여전히 현실의 불행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주인공을 극단적 불행으로 몰아넣고는 이야기를 그대로 매듭지어 버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서사 전략인지에 대해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제가 아는 한 사람들은 중요한 인물을 학대하는 서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불행을 위악적으로 전시하는 서사 역시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런 서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누군가에겐 지나치게 위악적인 서사가 다른 누군가에겐 끝내주게 감동적인 서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불행의 '강도'를 가지고 재현의 윤리를 논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건 '방향성'입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명분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를 묻는 거창한 질문도 결국엔 방향성에 관한 논의로 수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는 작품을 보고 '원래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절망적인 현실에도 끝내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맞는 얘기예요. 둘은 굳이 대립할 필요도 없습니다. 작품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의 방향성이 타당하다면 독자는 지독한 비극에서도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 의심하면 안 돼요.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나혜림의 『클로버』 또한 그런 논의를 이어가기에 유의미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는 어느 미성년이 맞닥뜨리는 혹독한 현실을 그리면서도 내내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습니다. 유머의 동력은 주인공 '정인'과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악마 '헬렐 벤 샤하르(루시퍼)'의 파트너쉽에서 나오고요. 고양이 악마가 등장한다고 하니 왠지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타지 느낌도 나지만 이야기 속 플롯들은 아주 무겁고 현실적입니다. 이 이색적인 조합이 작품의 인상을 돋보이게 하지요.


정인은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자입니다. 할머니와 정인의 삶에는 늘 가난과 고단함이 따라붙습니다. 그런 정인에게 어느 날 악마의 유혹이 기회처럼 찾아옵니다. 악마는 정인에게 '만약에' 한 마디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 줄 수 있다고 말하지요. 이 작품에서 악마 캐릭터는 굉장히 지적이고 매력적입니다. 하긴, 누군가를 유혹하려면 이 정도 지성과 매력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못되게 생긴 악마의 말에 주인공이 솔깃하는 이야기는 납득이 잘 되지 않죠. 어쨌거나 정인은 몇 번의 위기 끝에 유혹을 뿌리치고 고단한 현실로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성공이 맞나요.


정인의 현실에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있고, 미성년자 노동이 있고, 그걸 조롱하는 친구가 있고, 나쁜 햄버거 가게 사장도 있고, 폐지를 줍다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입원한 할머니가 있고, 좋아하는 친구 앞에 내보이기 부끄러운 낡은 운동화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보호받기는 커녕 불행한 삶의 면면들을 그러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로 끝끝내 돌아와야 할 이유가 대체 뭘까요. 그 답은 물론 현실의 어린이·청소년 독자에게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재현의 윤리의 연장선에서 보았을 때,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행한 삶들을 오롯이 긍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독자에게는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전 이것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내는 이야기의 기술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소설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가 있어?'라는 질문에 대해 거의 언제나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건 단순히 현실이 잔혹하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현실은 대체로 오락가락합니다. 잔혹할 때도 있고 황홀할 때도 있어요. 그러니 굳이 변덕스러운 현실을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창으로 기능하려면, 문학적 지평이 현실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방향성'에 관한 얘기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중요한 건 이것이 동시대 독자의 현실을 보다 넓은 층위에서 포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볼 때 『클로버』는 충분히 좋은 방향성을 보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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