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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Oct 22. 2022

익숙해진 것들의 뿌리

질 머피, 『꼴찌 마녀 밀드레드』, 이지북, 2021

* 쪽수: 168



질 머피Jill Murphy의 『꼴찌 마녀 밀드레드The Worst Witch』는 총 여덟 권으로 구성된 시리즈입니다. 1974년에 영국에서 1권이 출간되었고, 2018년에 8권이 출간되었지요. 1986년에 한 번 영화로 만들어졌고, 1998-2001년에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영된 적도 있네요. 2017년에는 동명의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제작되었는데 '벨라 램지'가 '밀드레드 허블' 역을 맡았습니다. <왕좌의 게임>에도 비중 있게 출연했고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힐다>에서 주인공 역 성우를 맡기도 한 배우지요.


최근에 넷플릭스 시리즈를 통해 이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은 <해리포터> 설정과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여러 가지 설정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거나 최소한 적극적으로 참고했다고 생각하지요. 원작의 최초 발표 연도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은 절반은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기숙형 마법학교 이야기를 영상화하면서 해리포터를 피해 가는 건 이제 사실상 불가능하거든요. 그럴 이유도 없고요.


그럼에도 우리는 원작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도로 영국적인 기숙형 마법학교, 그곳에서 싹트는 세 친구의 우정, 나쁜 친구와의 대립, 마법 주문 수업, 마법약 수업, 빗자루 비행 수업, 유능하고 무뚝뚝한 선생님, 인자한 교장 선생님과 같은 일련의 세팅은 모두 『꼴찌 마녀 밀드레드』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해리포터 시리즈가 처음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때, 아주 많은 영국인들이 그걸 밀드레드 시리즈의 공으로 돌렸다고 하지요. 그것 역시 어느 정도는 합당한 대우일 겁니다. 어렸을 때 밀드레드를 읽고 자란 영국인들에게 해리포터 이야기는 그렇게 새롭지는 않았을 거라서요. 롤링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죠. 즉 이 이야기는 이제는 익숙하게 알려진 것들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해리포터가 그랬던 것처럼 『꼴찌 마녀 밀드레드』도 다수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흥미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마녀 학교 이야기가 어린이 독자에게 무섭게 느껴질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하고요. 책을 읽어보면 그게 얼마나 황당하고 어린이 독자의 현실과 동떨어진 걱정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동화적이지 않은' 동화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우려가 상당히 고리타분한 현실 인식과 무관심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편견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작품의 원제는 'The Worst Witch'이고, 이는 물론 주인공 밀드레드 허블을 위한 수식어입니다. 즉 이 이야기는 사고뭉치 밀드레드가 '꼴찌 마녀'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보기에 '꼴찌 마녀'는 다른 누구에게 내어줄 수 없는 밀드레드만의 고유하고도 사랑스러운 정체성입니다. 세상엔 꼴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고, 독자는 바로 그 지점에 매혹되는 것이죠. 시리즈의 마지막 8권의 원제는 'First Prize for the Worst Witch'인데, 꼴찌 마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꼴찌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 제목으로도 손색이 없지요. 한국에는 '좌충우돌 최우수 마녀 시상식'으로 번역되어 들어왔습니다.


『꼴찌 마녀 밀드레드』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지점은 이것이 기본적으로 여성 어린이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마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1974년부터 2018년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준 이 작품의 무게추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점에서 볼 때 『꼴찌 마녀 밀드레드』는 『빨간 머리 앤』(1908), 『롤러스케이트 타는 소녀』(1936),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1945), 『위풍당당 질리 홉킨스』(1978), 『종이 봉지 공주』(1980) 와 같이 여성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뛰어난 작품들과 결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선 과연 어떤 작품이 이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추측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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