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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14. 2022

혀를 내두르게 되는 기발함

크리스천 맥케이,『어린 여우를 위한 무서운 이야기』, 밝은미래, 2020

* 쪽수: 416



오늘은 크리스천 맥케이 하이디커Christian McKay Heidicker의 장편 『어린 여우를 위한 무서운 이야기Scary Stories For Young Foxes』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표지에 나와있다시피 2020 뉴베리 아너상 수상작이고요. 어린 여우의 연약함을 매개로 다양한 종류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호러입니다. 좀비가 된 여우, 인간, 괴물, 괴물보다 더한 핏줄, 엄혹한 자연의 생리 같은 것들이 때마다 공포의 대상이 되어 찾아옵니다. 그중 일부는 놀라울 만큼 기발하지요.


이야기의 시작은 어두컴컴한 동굴입니다. 어린 여우 일곱 마리가 무서운 이야기를 찾아 동굴에 옵니다. 동굴 속의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어린 여우들에게 들려줍니다. 즉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서사는 모두 이야기꾼의 이야기 속에 들어있지요.


첫 번째 이야기는 전형적인 좀비물입니다. 암여우 '빅스'는 원인 모를 에 감염되어 노란 악취를 풍기며 다른 여우를 물어뜯습니다. 빅스에게 물린 여우는 빅스와 같은 증상을 보이게 되고요. 주인공 암여우 '미아'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빅스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납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지요.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나자 무서운 이야기를 청해 듣던 어린 여우 일곱 마리 중 한 마리가 떠나갑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한 마리씩 떠나고, 마지막에 남은 어린 여우가 이야기의 결말을 장식하죠.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야기꾼의 정체도 그때 밝혀지고요. 사실 이런 포맷에서 이야기꾼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아요. 보통 인과적으로 가장 잘 들어맞는 인물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특별한 반전을 의도하지 않은 이상 그 인물이 스토리텔러가 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우니까요. 이 작품 역시 그렇죠. 다만 그걸 짐작하거나 알아맞히는 게 여기선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꾼의 정체를 알든 모르든 독자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절묘하고도 의미 있는 결말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율리'라는 이름의 수여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율리는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여섯이나 되는 자매들은 오히려 율리를 괴롭히고 조롱합니다. 어린 율리에겐 그것만으로 이미 가혹한 일이지만 곧 더 큰 공포가 찾아옵니다. 어느 날 나타난 율리의 아빠 '윈'은 율리의 엄마에게 장애를 가진 율리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율리는 간신히 달아나는 데 성공하지만 깜깜한 숲 속에서 외톨이가 되고 말지요.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 단연 독자의 눈에 띄는 것은 세 번째, '트릭스의 집'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트릭스'는 영국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입니다. 그가 만든 『피터 래빗 이야기The Tale of Peter Rabbit』는 20세기 최고의 아동문학 작품 중 하나로 꼽히지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트릭스는 그에 대한 오마주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실제론 반대입니다. 이 책에서 베아트릭스 포터는 무시무시한 악당이에요. 그건 포터가 동물들의 습성과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기 위해 행했던 작업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포터는 동화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면서 동시에 해부학자이기도 했으니까요. 야생 여우의 입장에선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죠. 그리고 이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는 독자에게도 굉장히 공포스러운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베아트릭스 포터는 피터 래빗을 읽을 때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건 정말 흥미로운 체험이에요. 동시에 이 작품이 지닌 탁월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지점이지요.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드디어 미아와 율리가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미아와 율리는 여리고 약한 새끼 여우였어요.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엄마 여우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려 했지요.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둘이 동행하게 되는 시점부터는 포지션이 사뭇 달라집니다. 둘은 서로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동시에 용기를 북돋워주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끝내 함께 걷기를 멈추지 않는 두 인물의 여정에는 공포와 두려움을 넘어서는 감동이 있지요.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수난과 극복의 서사로 이어집니다. 전반부가 정통 호러의 오싹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면, 후반부에는 먼 곳에서 비추는 빛을 향해 묵묵히 가시밭길을 걷는 순례자의 결연함 같은 것이 서사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습니다. 호러 장르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와 관계없이, 이런 종류의 서사에 빠져들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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