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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29. 2022

온전함에 대하여

시시 벨, 『엘 데포』, 밝은미래, 2020

* 쪽수: 288



시시 벨Cece Bell의 『엘 데포El Deafo』는 그래픽 노블로서는 최초로 뉴베리 아너 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수상 연도는 2015년이었고요. 제목의 '데포Deafo'는 청각장애인을 뜻합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청각장애인인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청각장애는 작가 시시 벨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한 사람의 복잡다단한 정체성은 한두 가지의 기준으로 다 파악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무언가 눈에 띄는 특징을 발견하면 곧 그것으로 그 사람을 규정하곤 합니다. 때로는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뭐가 문제인지도 알기 어렵죠. 『엘 데포』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관습적이고 무신경한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작품입니다.


시시 벨은 네 살 때 뇌수막염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고도 난청을 얻었습니다. 보청기를 쓰지 않고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어린 나이에 큰 변화를 겪고 힘겨운 시기를 보낸 시시 벨은 그럼에도 이 책이 모든 농인의 경험을 대표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청력 손상을 경험하는 방식과 정도는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독자가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시시 벨이라는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그 일부를 이해하는 데에도 소설 한 권만큼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것으로도 완전한 이해에 다다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독자는 청각장애인들이 겪는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신, 한 사람을 오롯이 이해한다는 말의 무게를 조용히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품 속 주인공은 자신을 '데포'가 아니라 '엘 데포'라 부릅니다. 여기서 '엘'은 고유한 대상 앞에 붙이는 스페인어 정관사입니다. 세상에 '데포'는 많지만 '엘 데포'는 한 명뿐이라는 것이죠. 시시 벨은 이러한 명명을 통해 모든 고유한 존재 안에 내재하는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간결하게 역설합니다. 동시에 어느 한 개체가 그와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일군의 집단을 대표하는 것(또는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하지요. 즉, 엘 데포는 엘 데포일 뿐입니다. 그가 다른 데포에 비해 더 많은 대표성을 다거나 여분의 가치를 지닌다고 간주할 근거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엘 데포의 이야기는 시종 '온전함'과 '온전치 않음'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이는 자연히 장애와 비장애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지지요. 사실 전 장애에 관해 말하거나 쓰는 것이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지식도 실천도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 비장애인이 말하는 장애란 얼마나 얄팍한 것일까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남성이 말하는 여성 혐오, 이성애자가 말하는 동성애, 절대빈곤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자가 말하는 가난, 고되게 일해본 적 없는 자가 말하는 노동, 전쟁터에 내던져져 본 적 없는 자가 말하는 전쟁이란 모두 얼마간 공허함을 내포하게 마련이지요. (제가 꼭 그런 삶을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삶도 다른 모든 이의 삶과 마찬가지로 몇 마디 문장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복잡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전 책과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에 대해 틈틈이 글을 쓰지만, 그렇게 쓰인 글이 누군가에겐 마른 껍데기처럼 공허해 보일 수도 있다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나쁘거나 소름 끼치도록 위선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때마다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엘 데포』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말이지요. 저는 세계를 이루는 아주 작은 부분조차도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온전치 않다는 바로 그 사실이 어떤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자격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의 결함을 다름으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일 테니까요. 결국 그 모든 다름을 잘 보듬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불러일으키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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