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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25. 2022

SF 판타지의 동화적 가능성

최영희, 『써드』, 동아시아사이언스, 2020

* 쪽수: 180



최영희는 한국에서 어린이·청소년 독자를 위한 SF를 찾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이름입니다. 단편 「안녕, 베타」로 제1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받았고, 단편 「그날의 인간병기」로 2016 SF어워드 우수상을 받았지요. 전 얼마 전 《아동문학평론》 2022년 겨울호에 청소년 소설 읽기를 주제로 한 지면에서 「안녕, 베타」를 짧게 소개했는데, 그 밖에도 『구달』(2017), 『칡』(2020), 『써드』(2020), 『검은 숲의 좀비 마을』(2022) 등 논의해봄직한 작품들이 여럿 있습니다.


최영희의 강점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입히는 솜씨에서 잘 드러납니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구축하는 논리 자체는 아주 헐렁한데, 그 헐렁한 세계에서 피어나는 공기는 독자의 오감을 치밀하게 자극하지요. 그만큼 이야기 속에 푹 절여지는,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작품들에서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집니다.


오늘은 그중 『써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써드Third'는 말 그대로 제3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주인공 '요릿'이 숲 속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붙여준 이름이지요.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써드는 인간과 기계인간(인공지능)의 뒤를 잇는 제3의 지성체에 관한 상상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상상한 써드, 곧 제3의 존재는 '일그러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써드는 자기 존재의 기원에 의문을 품고 있는 괴물입니다.


그 순간 괴물이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누구입니……까?"

57쪽


당연하게도 이야기의 메인 모티프는 메리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 또는 근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1818)입니다. 보통 『프랑켄슈타인』으로 줄여 부르는 바로 그 작품이고, 흔히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최초의 SF 소설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써드』는 이야기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작품이 지닌 영감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괴물 '써드'를 창조한 인물의 이름 역시 '닥터 프랑켄'이지요.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존재의 근원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그와 유사한 질문은 「안녕, 베타」에서 훨씬 섬세하게 다루어진 바도 있고요. 『써드』는 그보다 가벼운, 이를테면 SF 판타지의 동화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정도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예컨대 이 이야기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숲에서 일어난 하나의 살인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SF 판타지 설정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렇게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싶은 것이죠. 동화나 청소년 소설에서 이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 통상적인 장르 규범의 도움 없이 일어나려면, 훨씬 더 현실적이면서 개연성 있는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한편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인물은 인간 '요릿', 로봇 '리처드', 괴물 '써드'로 도식화될 수 있습니다. 각각 제1, 제2, 제3의 존재를 대변하고요. 이야기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 역전을 기본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기계를 처음 발명한 인간은 어느덧 스스로 진화할 정도의 지적 역량을 갖춘 기계인간에게 쫓겨나 황무지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계인간 '닥터 프랑켄'은 괴물을 창조해내지만 자신의 피조물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채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지요. 이 구도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강한 존재는 써드이고, 가장 약한 존재는 요릿입니다. 물론 이 관계는 다시 한번 역전되지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 나오는 써드 역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서글픈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이겠지요. 요릿은 괴물의 무고함을 먼저 알아보고 리처드와 함께 그를 도움으로써 약자를 품을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결국 약자를 힘으로 짓밟는 인물이 아니라 반대로 지켜주고 포용하는 인물이 진정한 강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이야기의 세계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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