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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19. 2023

동화를 바라보는 가장 포용적인 시선

김남중, 『동화 없는 동화책』, 창비, 2011

* 쪽수: 198



김남중의 『동화 없는 동화책』에는 여섯 편의 짧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개별 작품의 제목은 「수학왕 기철이」, 「날아라 장수풍뎅이」, 「마지막 손님」, 「혼자가 아니야」, 「그림 같은 집」, 「크로마뇽인은 동굴에서 산다」이고요.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이 이야기들은 동화와 아동문학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지금 읽는다면 역시 조금 새삼스럽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당연하지요. 요즘은 행복하지 않은 결말 때문에 동화를 동화답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저 말은 예전에도 좀 이상하기는 했어요. 동화 반드시 행복한 결말을 택해야 한다는 건, 바꿔 말하면 어린이 독자는 슬프고 불행한 결말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아동문학이라는 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람들을 오히려 축소하고 수단화하는 희한한 논리인 것이죠.


어쨌거나 2011년은 '동화 없는 동화책'이라는 꽤 노골적인 제목을 내건 동화책이 의미 있는 시도로 주목받을 정도로 이상한 주장이 공공연히 먹혀들던 시기입니다. 중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동화에 대해 좀 고리타분한 소리를 자신 있게 하는 사람들은 주로 아동문학에 어떤 식으로든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뚜렷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아요. 대부분은 관심이 없고요.


동화의 끝을 어떻게 장식할지 결정하는 것은 작가의 일이고, 그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어린이 독자에게 달린 일입니다. 책과 이야기를 매개로 한 정서적 교류는 아주 내밀하고 개별적이며 측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동화다운 것과 동화답지 못한 것을 가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이러이러한 것은 동화답지 못하다'라는 배제 논리보다 더욱 실용적인 접근은 '동화는 이러이러할 수 있다' 또는 '동화는 이러이러해도 된다'일 겁니다. 『동화 없는 동화책』이 지금도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포용적인 시선을 작품 안에 가득가득 담아냈다는 것이겠죠. 이런 스탠스 자체는 아마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은 유효할 겁니다.


「수학왕 기철이」, 「마지막 손님」, 「혼자가 아니야」, 「그림 같은 집」은 모두 역설적인 제목이 주제의식을 극적으로 강화하는 작품입니다. 「수학왕 기철이」의 주인공 기철이는 경시대회 학교 대표로 뽑힐 만큼 수학 실력이 뛰어나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경시대회 전문 학원에 다닐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빠듯한 가계부를 뒤적여 가며 계산에 매달려봐도 학원비 나올 곳은 도통 찾을 수 없습니다. 기철이에게 있어 '수학왕'이란 타이틀은 그저 계산적인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일 뿐, 정작 그 자신의 꿈이나 희망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요.


「마지막 손님」은 2007년 태안군 앞바다에서 있었던 기름 유출 사고 직후의 한 횟집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조선에서 새어 나온 기름으로 검게 덮인 바닷가에서, 선미의 부모님은 자원봉사자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선미 아빠가 자원봉사자 여덟 명을 데리고 와서 기름 유출 전에 잡은 마지막 고기로 회 한 상을 차려냅니다. 그러나 곧이어 들리는 자원봉사자들의 건배사를 통해, 선미네 가족은 이들이 바다를 검게 물들이고도 책임을 회피하는 바로 그 회사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귀한 손님인 줄만 알았던 이들이 자기네 정체가 탄로 나자마자 되려 큰소리치며 거칠게 돌변하는 장면은 이 이야기의 비극성을 한 층 강렬하게 부각합니다.


「혼자가 아니야」에서 이랑이는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면사무소 게시판에 산불 감시원 모집 공고가 붙습니다. 연탄불조차 때기 어려운 형편인 이랑이 할아버지는 곧장 면사무소로 달려가 1번으로 지원서를 내고는 체력 시험을 준비합니다. 시험 당일, 이랑이 할아버지는 다행히 6등으로 합격합니다. 하지만 몇 달 전에 암 수술을 한 또 다른 참가자는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체력 시험에 끝까지 임했음에도 결국 꼴찌로 탈락하게 되지요. 이 일마저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그에게 면사무소 직원은 정 그러면 합격자 중 자리를 양보할 사람을 찾아오라고 말합니다. 좀 전까지도 그를 한 목소리로 응원하던 마을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탈락한 참가자만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그림 같은 집」에 나오는 영산이네 아빠는 언젠가 '그림 같은 집'에서 살 날을 꿈꾸며 식당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산이네 식당이 자리한 골목이 재개발 사업지로 선정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본 적 없는 회색 남자들이 갑자기 식당가에 나타나 때리고 부수며 갖은 행패를 부리는데, 경찰은 식당 사람들을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영산이가 책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가는 동안, 영산이 아빠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그림 같은 집을 가까운 5층 건물 옥상에 짓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벽, 아빠가 올라가 있는 건물에서 불이 납니다. 이로써 독자는 이 동화가 2009년 한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긴 용산 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에 관한 아픈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야기는 이 정도까지만 소개하기로 하고, 이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린이 독자가 읽기에 부적절해 보이시나요. 소재나 주제, 또는 결말의 적절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서, 전 이제 이 이야기들이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도 않아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매력적인 이야기이고 동시에 훌륭한 동화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담백하게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기존의 경직된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어왔고, 그중에서도 『동화 없는 동화책』은 매우 뚜렷한 성과를 거둔 시도였다는 사실은 기억되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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