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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Apr 09. 2023

가능성의 지평을 넓히는 상상

이희영, 『페인트』, 창비, 2019

* 쪽수: 206쪽



삶에는 바꿀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만으로 저절로 따라붙는 이런 조건들은 개인의 삶을 큰 폭으로 좌우하기도 합니다. 정작 그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방식으로요. 그중 어떤 것들은 아주 부당하고 부조리하죠.


생득적 조건을 스스로 바꾸거나 선택할 수 있는 세계에 관한 상상은 그래서 더 흥미롭습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에서도 종종 그런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게 되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에 주목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 일의 고됨을 방증합니다. 간혹 그것은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하지요. 예컨대 원치 않는 핏줄과의 절연이란 얼마나 무거운 일일까요.


SF에서는 그와 유사한 일이 비교적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희영의 『페인트』에서 NC(Nation's Children, 국가의 아이들) 센터에 모여 사는 아이들은 면접을 통해 제 부모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페인트'라는 제목도 여기서 왔죠. 페인트는 Parent's Interview, 즉 부모면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양육자를 선택할 수 있는 세계인 겁니다.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어떤 주체도 삶 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삶이란 부모의 의지의 산물입니다. 부모는 동의를 구하지 않고 누군가를 살아있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거꾸로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터무니없거나 어색하게 여겨져 왔지요. 하지만 SF적 공상을 곁들이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부모를 자식의 선택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여겨졌던 가능성의 지평을 한 줌 넓히는 것은 SF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졌는지 구체적인 맥락을 살펴보아야겠죠. NC 센터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아기 때 제 부모로부터 한 번 버림을 받았습니다. 낳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지 않는 부모는 점점 많아졌고, 출생률이 극도로 낮아진 한국은 이런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 NC 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를 국가가 책임지고 키우겠다는 겁니다.  결과 사람들은 제가 낳은 아기를 합법적으로 센터에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어설픈 정책이죠. 저런 기관이 존재한다고 해서 맘 편히 아기를 낳을 사람들이 현실에 얼마나 있겠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설정이 버젓이 작동하기도 합니다. SF에서는 특히 더 그렇죠.


아이들은 NC 센터에서 최대 열아홉 살까지 머물 수 있습니다. 페인트를 통해 맘에 드는 양육자를 찾으면 센터에서 나가게 되고요. 문제가 생기면 다시 돌아오기도 합니다. 주인공 '제누 301'은 열일곱 살입니다. 페인트로 자신에게 적합한 부모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2년 정도 남은 것이죠. 만약 그때까지 부모를 고르지 못하면 홀로 나가 독립해야 합니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기간 내에 부모를 찾은 아이들의 ID카드에선 NC 센터 출신이라는 기록이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작품이 묘사하는 배경의 뉘앙스에 따르면 한국은 여전히 고강도 차별사회입니다. NC 센터 출신이라는 기록은 차별주의자들의 입맛에 꼭 맞는 표식으로 기능하는 듯하지요.


NC 센터에는 일련번호로 불리는 아이들과 그들을 관리·감독하고 페인트를 주선하는 가디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이름은 NC 센터에 들어오는 달을 따라 지어집니다. 1월에 들어온 남자아이는 제누, 여자아이는 제니, 같은 방식으로 6월에는 준과 주니, 이런 식이죠. 같은 달에 들어오는 아이들에겐 서로 다른 순번을 부여하여 구별합니다. 주인공 제누 301은 1월에 입소한 301번째 남자아이인 것이죠. 제누 301의 룸메이트인 '아키 505'는 10월에 입소한 505번째 남자아이이고요. 이런 기계적인 명명은 작중 배경의 톤을 한층 어둡고 울적해 보이게 합니다.


아이들은 가디언을 '가디'로 줄여 부릅니다. NC 센터에서 일하는 가디는 이름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가디를 성으로 구별하죠. 이야기 속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가디는 '박'과 '최' 두 사람입니다. 센터장 박은 단호한 원칙주의자이고, 센터B(남자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근무하는 유일한 여성 가디 최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아는 유능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박과 최는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센터의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있습니다.


NC 센터에서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페인트를 신청한 부부는 '프리 포스터(pre foster, 예비 양육자)'라 불립니다. 면접을 거쳐 입양에 성공한 부부는 정부 지원 혜택을 받게 되고요. 때문에 대부분의 프리 포스터들은 센터 아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반듯하게 꾸며진 모습을 연출합니다. 이런 모습은 달리 보자면 준비된 양육자로서의 태도라고도 해석될 수 있을 텐데, 정작 제누 301의 눈에는 그다지 매력 있어 보이지 않지요. 그런 제누 301에게 어느 날 투박하고 소탈한 '서하나'와 '이해오름' 부부가 찾아옵니다. 가디들이 보기에 이들은 준비되지 않은 양육자이지만, 반대로 제누 301에겐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보이지요. 제누 301은 이들과 3차 면접까지 진행하며 가족과 관계에 대한 고민을 이어갑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하나만 언급하자면, 『페인트』에는 악역이 없습니다. 최근 어린이·청소년 문학작품에서 악랄한 인물을 배치하지 않고 성장 서사를 그려내는 경향이 늘어난 것은 사실인데, 그럼에도 이 작품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마치 작가가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는 듯한 문장들이 빈번하게 나오거든요. 그를 통해 독자는 이미 한 번씩 버려졌던 아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싶어 하지 않는 작가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의 얼개를 대략 소개해봤는데,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을 겁니다. 이곳에서 쓰이는 이름들은 모두 영어를 경유해서 지어졌습니다. 제목인 '페인트'부터 시작해서, 인물의 이름으로 쓰인 '제누', '아키', '노아', '준'도 그렇고요. 이들의 보호자인 '가디'나 잔심부름을 맡는 로봇 '헬퍼'도 그렇죠. 'NC 센터'도 그렇고, 아이들을 성별에 따라 나누는 '센터B', '센터G'도 그렇고, 아이들이 이용하는 오락 시설 'VR룸'이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가게 되는 '리모스룸'도 그렇습니다. 센터에 방문한 예비 양육자를 뜻하는 '프리 포스터'도 그렇네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개념이나 장치를 SF 세계관 안에 구축하기 위해 기존의 언어를 변주하는 방식은 잘 알려진 기법입니다. 그리고 작중에 의미심장하게 묘사된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어떤 용어를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창작자의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페인트』가 택한 어떤 이름들은 저로선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구식입니다. 한국어로 표현되었을 때, 또는 낯선 언어로 낯설게 명명되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하고 세련되게 전달될 수 있을 개념들도 보이고요. 어쩌면 이 작품이 지난 세기 SF에서 곧잘 행해지곤 하던 무신경한 관습을 일부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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