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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r 26. 2023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시간여행

오하림, 『순재와 키완』, 문학동네, 2018

* 쪽수: 124



제1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순재와 키완』은 매우 인상적인 도입부를 지닌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서술자의 존재감을 한껏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로 시작하는데, 이런 간결한 설정을 통해 서사의 긴장감을 높이는 방식은 잘 알려진 서술트릭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말부에 서술자가 누구로 밝혀지느냐에 따라 마치 스위치 버튼 하나로 불을 켜고 끄듯 작품 전체의 구도를 반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주로 미스터리 장르 작가들이 애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순재와 키완』에도 역시 미스터리한 현상이 존재합니다. 아홉 살 '차순재'의 인생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자신과 똑 닮은 같은 반 친구 '홍필립'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필립의 존재에 얽힌 내막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지요. 그 중요한 임무를 순재와 함께 하는 인물은 '키완 바익'입니다. 도입부는 키완 바익의 원래 이름이 '백기완'이었다는 것과 그가 키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을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SF적 관습에 따라 한두 번쯤 섞이면서 서사의 윤곽을 완성해 내지요. 때문에 SF의 장르 관습이나 트릭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 독자에게는 이야기 구조가 꽤 복잡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극장이나 OTT에서 훨씬 복잡하고 화려한 트릭을 선보이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요.


후반부에 드러나는 서술자의 정체는 '시간여행자의 친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시간여행 SF로 분류될 수도 있겠죠. 한 번 흘러가버린 시간에서 순재는 아홉 살 때 교통사고로 죽었고, 키완은 세계적인 로봇 공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키완은 어릴 적에 잃어버린 친구 순재와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순재와 똑 닮은 필립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필립은 순재가 아니었고, 결국 키완은 과거로 돌아가 순재를 살리기 위해 시간여행자를 수소문합니다.


그렇게 필립은 순재를 살려내라는 박사의 지시에 따라 과거로 왔지만 자신의 임무를 탐탁지 않아 합니다. 순재를 살리면 키완이 로봇 연구에 매달릴 이유가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필립 자신도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전형적인 타임 패러독스죠. 순재를 살리면 필립이 사라지게 되고, 순재를 살리지 않으면 시간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필립은 순재를 살리지 않는 선택을 하는데, 이야기의 결말은 다분히 손쉬운 방식으로 필립의 선택을 무력화합니다.


이 작품의 부제는 '두 아이가 만난 괴물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괴물'이라는 표현은 두 겹의 의미망을 갖습니다. 키완과 같은 반에 있는 일부 친구들은 키완을 괴물이라고 놀리며 웃습니다. 생김새가 눈에 띄고 발음이 조금 어눌하다는 이유로 말이죠. 자연히 독자는 이 상황에서 누가 더 괴물에 가까운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괴물'이 최종적으로 수식하는 대상은 죽음입니다. 키완은 어릴 적 부모를 따라 타지에 있다가 부모를 잃은 뒤에 한국에 왔어요. 그리고 아홉 살 때는 친구 순재의 죽음을 지켜보았지요. 어릴 때 겪은 죽음과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후 키완의 삶 전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만든 로봇을 과거로 보내 순재를 살려내게 하지요. 단 한 사람의 삶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상상만으로도 벅찬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필립이 순재와 키완에게 미래의 진실을 말해주는 장면은 그래서 더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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