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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r 16. 2023

캐릭터가 주는 기대감

김혜정, 『오백 년째 열다섯』, 위즈덤하우스, 2022

* 쪽수: 220



가끔 뱀파이어 장르물을 읽습니다. 근 몇 년 동안 읽은 뱀파이어물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천선란의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2021), 그리고 정이담의 『괴물 장미』(2019)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트와일라잇』 시리즈(2005-2008)도 빼놓을 수 없고요. 최근에는 닐 게이먼이 참여한 앤솔러지 『이야기들Stories All-New Tales』에 실린 로디 도일의 단편 「피Blood」(2010)를 읽었는데, 거의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1819)나 조셉 셰리든 레퍼뉴의 「카르밀라」(1872)를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혹시 이것들을 읽어보고 싶다면 『뱀파이어 걸작선』(2006)을 구입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한국 어린이·청소년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글에서 난데없이 뱀파이어 이야기로 서두를 뗀 이유는, 오늘 소개하려는 책 『오백 년째 열다섯』이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 설정을 서사의 주축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가을'은 '종야호'로 분류되는 여우 인간입니다. 오백 년 전에는 '서희'라는 이름의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위기에 빠진 여우를 구한 대가로 불로불사의 존재가 된 것이죠. 서희가 종야호가 되던 당시의 나이가 열다섯이었기 때문에 이후 주기적으로 거처와 이름을 바꾸며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종야호들은 총 3단계 둔갑술 중 2단계까지 부릴 수 있다고 하지요.


종야호의 기본 설정은 현대 뱀파이어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불로불사의 존재, 초인적 능력,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 틈에 섞여 사는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지요. 물론 이런 설정은 뱀파이어 장르에서만 단독으로 발전해 온 것은 아닙니다. 뱀파이어의 뼈대를 이루는 발상 자체는 세계 곳곳에서 비슷비슷하게 전해 내려온 괴담의 연장선 상에 있지요. 중요한 건 그 기본 발상이란 재료를 가지고 얼마나 매혹적인 결과물을 빚어냈는가일 텐데, 뱀파이어는 이 지점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이뤄낸 장르입니다. 그리고 전 『오백 년째 열다섯』이 그러한 성과를 다분히 한국적인 방식으로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시리즈 2권 『오백 년째 열다섯 2: 구슬의 무게』가 출간되었지요.


이 작품에서 '야호(여우 요괴)' 캐릭터의 모티프는 한반도의 건국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환웅은 곰과 범에게 쑥과 마늘을 삼칠일 동안 먹고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 자리에 여우도 있었던 거예요. 곰과 범은 동굴로 들어갔지만 여우는 싫다고 거절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프롤로그입니다. 알려진 대로 호랑이는 중간에 뛰쳐나왔을 것이고, 그렇게 여우와 호랑이는 각각 '야호족'과 '호랑족'으로 무리를 이루어 대립관계를 형성하게 되지요. 이후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은 두 종족의 전쟁으로 채워집니다.


가을은 두 종족의 화합을 상징하는 주인공입니다. 좀 뻔하긴 하지만, 이야기의 딱 절반이 되는 시점에 출생의 비밀이 하나 밝혀집니다. 알고 보니 가을이 오백여 년 전에 인간과 호랑족의 결합으로 태어난 존재였던 것이죠. 즉, 호랑족의 반쪽짜리 후손인 가을이 우연히 종야호로 거듭나게 되면서 족보가 꼬여버린 겁니다. 야호족은 그런 가을을 탐탁지 않아 합니다.


이야기는 전체 4부 중 3부까지를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로 채우다가 3부 말미에 갑자기 톤을 전환시키는 사건을 배치합니다. 바로 야호족의 우두머리이자 환웅에게 최초의 구슬을 받은 '령'의 죽음입니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상징적인 지도자가 죽은 것이죠. 령이 받았던 구슬에는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신비한 능력이 깃들어 있고 오백 년마다 구슬의 수가 두 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두 종족은 오백 년에 한 번씩 구슬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령이 죽은 해는 지난 전쟁으로부터 딱 오백 년이 흐른 시점이고요. 이야기는 두 종족의 대립 관계에서 쌓인 긴장을 4부의 구슬 전쟁으로 풀어냅니다.


하지만 4부의 내용은 좀 많이 아쉽습니다. 뒤로 갈수록 사건을 묘사하는 문장의 밀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요. 펼쳐놓은 이야기를 안정감 있게 매듭지을 동력을 잃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캐릭터 설정이 갖는 매력으로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려놓은 뒤라 더욱 아쉬움이 큽니다. 이전부터 한반도 설화나 옛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반인반수 캐릭터가 하나의 장르로 뿌리내리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결과적으로 『오백 년째 열다섯』은 시도가 지닌 잠재력에 비해서는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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