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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r 07. 2023

다정한 마음으로 빚어낸 평행 우주

전수경, 『우주로 가는 계단』, 창비, 2019

* 쪽수: 176



SF는 참 다정한 장르입니다. 많은 경우에 SF가 우주적 스케일의 상상을 경유하여 도착하는 목적지는 다름 아닌 인간입니다. 더 정확히는 인간의 내면에 뿌리내린 사랑,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이죠. SF 하면 왠지 차갑고 음울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리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다정함이 놓여 있네요. 좋아하는 대상에게서 다정한 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즐겁고 뿌듯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다정한 SF동화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SF가 얼마나 다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들어본 적 없지만, 혹시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저는 전수경의 『우주로 가는 계단』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23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동화 부문 대상 수상작이고요. 중간중간 저명한 과학자나 과학 이론과 관련된 지식이 짤막하게 소개되며 이야기의 전개를 흥미롭고도 매끄럽게 이어줍니다. 특히 이 작품의 핵심 모티프가 되는 아이디어는 평행 우주 이론인데, 이야기 속에 굉장히 서정적인 방식으로 녹아들어 있지요.


시작부터 이웃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으로 가득한 동화입니다. 아파트 한 동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처럼 많은 이웃에게 일일이 관심을 보이는 어린이 주인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그 첫 번째 비결은 계단에 있습니다. 주인공 '홍지수'는 폐소 공포증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20층에 위치한 삼촌 집을 매일 계단으로 오르내리지요. 지수가 이웃에게 품고 있는 관심은 바로 이 계단에서부터 싹틉니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경험하는 아파트와 계단을 통해 경험하는 아파트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맥락에서 계단은, 기본적으로 단절된 주거 공간인 아파트를 층층이 연결해 주는 장치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익숙하면서도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요. 21세기의 서울을 빼곡히 채운 아파트들은 왠지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대변하는 것만 같거든요. 아파트가 이처럼 다정한 곳으로 변화할 날이 정말로 올까요.


6학년인 지수는 3년 전 4월 20일, 외국 관광 중에 일어난 해일 사고로 부모님과 동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삼촌과 둘이 한집에 살게 된 것이죠.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에 마음이 저려올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에 불쑥 질투심이 치밀어 오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수는 강하고 따뜻한 사람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지수가 주변 이웃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이지요.


이야기는 지수와 친분이 있는 701호 할머니 '오수미'가 실종된 날로부터 D-Day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할머니의 실종이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에 놓고 겹겹이 싸여 있는 베일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긴장감이 찾아오지요. 사라진 할머니의 소재를 추리하기 위해 동원되는 여러 과학 이론에 대한 지수의 발상은 다분히 자의적인 면이 있고, 그래서 더 기발하고 흥미롭습니다.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른 추리 방식이랄까요. 어쨌거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일면 엉뚱한 생각에 잘 사로잡히는 것처럼 보이는 지수가 한편으론 대단히 진지하고 학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지수가 이웃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 번째 비결은 바로 과학적 탐구에 대한 애정입니다.


결말에서는 이 작품이 지닌 SF의 장르적 색채가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책의 제목인 '우주로 가는 계단'의 구체적인 내막도 밝혀지고요. 앞서 언급했듯 평행 우주의 모티프가 중요한 재료로 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할머니가 존재하는 세계의 시공간에 대한 가정은 다분히 동화적인데, 바로 그 점이 현실의 과학 이론에 기대어 성립한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지요. 이러한 매력은 실은 훌륭한 SF에서 종종 발견되는 반가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아파트의 계단에서 우주로 가는 길목에는 평행 우주 이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애정 어린 관심이 징검다리처럼, 군데군데 놓여 있지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접점으로 삼아 다른 우주에 대한 상상을 이끌어내는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 안팎의 우주에서 어린이 독자가 경험해야 할 감각 또한 그런 조건 없는 다정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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