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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06. 2023

고전과 SF의 현대적인 매치업

박애진 외,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 사계절, 2022

* 쪽수: 288



알려진 옛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시도는 그동안 장르 불문하고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하나의 옛이야기가 수백 번 리메이크되는 경우도 생각보다 흔하지요. (지금 아무 인터넷 서점이나 들어가서 '호랑이 이야기' 같은 걸 검색해 보세요. 결과에 잡히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예컨대 이 결과에는 이지은의 그림책 『팥빙수의 전설』(2019)과 『친구의 전설』(2021)이 잡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 안에 나오는 호랑이들이 옛 호랑이 캐릭터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옛날 작품이 지금 작품보다 더 뛰어나서가 아니에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스토리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한데, 그걸 먼저 포착한 몇몇 옛이야기들이 고전의 지위를 선점했을 뿐이죠. 이후에는 그 뼈대에 조금씩 살을 얹어가며 이야기의 계보를 발전시켜 온 것이고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작품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론 작가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온 이전 이야기들의 재결합, 재활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이야기―편의상 '옛날이야기'를 대체하는 말로 느슨하게 쓰겠습니다―를 곧장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쉼 없이 이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그런 시도들에 현대인의 관점과 감각이 반영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고요. 결국 재해석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옛이야기 자체가 지닌 매력보다는 작품에 반영된 현대적 감각의 설득력 유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다섯 편의 청소년 SF를 소개하겠습니다.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에는 SF로 변형·각색된 다섯 편의 옛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의식하고 보면 옛이야기들에는 장르적 색채가 뚜렷한 작품이 상당히 많거든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모체가 되는 이야기들만 봐도 그렇습니다. 책에는 변형된 「심청전」, 「별주부전」,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장화홍련전」, 「흥부전」이 실려 있는데, 모두 장르적 개성이 아주 강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지요.


그럼 작품별로 매치업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하나씩 뜯어볼까요. 먼저, 박애진의 「깊고 푸른」은 「심청전」의 변형입니다.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다채로운 소재와 주제를 가득 담고 있지요. 여기에서 청이네 가족은 사람들의 의체에 들어가는 부품을 수리하는 기술자 일을 하며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다친 팔다리를 의체로 개량하는 데 익숙하고요. 청이의 아버지도 타고난 눈의 시력이 안 좋아 할머니가 예전에 광산에서 구해 온 눈을 대신 끼우고 살아가는데, 이 눈의 성능이 너무 좋은 것이 되려 위기를 초래합니다. 권력자들은 아버지의 고성능 눈을 빼앗아가고, 일할 수 없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공장에 취직한 청이를 괴롭힙니다. 결국 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인당수 아래에 있는 광산으로 들어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로 하지요. 이 이야기에서 청이는 권력의 횡포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대응하는 능동적 인물로 묘사됩니다.


임태운의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코닐리오의 간」은 제목에 드러난 대로 「별주부전」의 이야기를 바꾸어 들려주고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인 '타르타루가'와 '코닐리오'는 각각 이탈리아어로 자라와 토끼를 뜻하고요. 타르타루가는 전투형 안드로이드이면서, 200년이 넘도록 젊은 여성의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용궁주의 충직한 신하입니다. 지나친 음주로 간이 나빠진 용궁주는 타르타루가에게 코닐리오의 간을 구해오라고 지시합니다. 코닐리오는 용궁주의 장기를 대체할 용도로 미리 만들어둔 클론입니다. 용도가 다한 클론은 곧장 폐기될 운명에 처해 있고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코닐리오는 타르타루가에게 저항하다 실패하자, 용궁에 끌려가 죽기 전 버킷 리스트에 있는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이후의 여정은 아주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흘러가지요. 짧은 시간에 마치 장편을 읽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김이환의 「밤의 도시」는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변형인데, 이 책에 실린 작품 중에선 원작과의 연결성이 가장 약하게 느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해도 달도 오누이도 아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호랑이의 대사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의 이미지거든요. 「밤의 도시」는 이걸 써먹지 않고 있기 때문에 원작의 뉘앙스가 상대적으로 옅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럼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익숙한 모티프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 소녀 '루비'와 소년 '럭키'의 조합, 주기적으로 나타나 빛나는 돌을 요구하는 호랑이 외계인, 주인공이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장면 같은 것들이지요. 그리고 작가는 이 모든 사건의 배경이 되는 도시를 거대한 세대 우주선으로 설정함으로써 SF에서 오랫동안 쓰여 온, 이질적인 세계관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명섭의 「부활 행성: 홍련의 모험」은 「장화홍련전」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호러 장르 마니아들에게 이 이야기는 원작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로 훨씬 더 많이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원작도 원작이지만, 실제 사건 기록 자체도 굉장히 강렬하고 끔찍합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그걸 좀 희석하는 면이 있지요. 「부활 행성: 홍련의 모험」은 계모 허 씨의 계략으로 곤경에 처한 언니 장화와, 그 뒤를 쫓는 동생 홍련의 모험을 뼈대로 삼아 서정적인 SF서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68시간 전, 장화는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다고 알려진 부활 행성 부근 궤도에서 실종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홍련은 곧바로 언니를 찾기 위해 우주선에 오릅니다. 처연한 가족사를 우주 속 신비로운 여정 위에 녹여낸 매혹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김성희의 「흥부는 답을 알고 있다」는 「흥부전」의 국민빌런인 놀부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인터뷰가 전개되는 시점은 흥부가 대박을 맞고 놀부가 쪽박을 찬 「흥부전」의 결말 이후입니다. 이 세계의 흥부는 『흥부의 과학』이라는 책을 써서 백만장자가 되었고, 놀부는 그런 흥부를 따라 하다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이곳은 흥부와 놀부의 판세가 거꾸로 뒤바뀐 세계인 것이죠. 약자의 처지에 놓인 놀부의 언어는 대단히 유창하고 논리정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독자의 폭소를 이끌어내는 포인트가 되지요. 사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저마다 조금씩은 익살을 부리고 있는데, 「흥부는 답을 알고 있다」는 개중 가장 코미디에 진심인 작품입니다. 글로 사람을 소리 내어 웃게 만들기는 정말 쉽지 않은데, 이 작품은 그 어려운 일을 보란 듯이 거뜬하게 해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공통된 미덕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 책은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기획된 SF 앤솔러지입니다. 그래선지 여기 실린 이야기들에는 SF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와 장치와 트릭이 굉장히 친절하고 다정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간혹 필요하다면 그 소재에 반영되어 있는 과학적 발상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기도 하지요. 이런 설명은 자칫 구구절절한 느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꽤 섬세한 균형감각이 필요한데, 이 책에선 한 번도 지루하단 느낌을 받지 않았어요. 그 능수능란함에 내내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SF에 이제 막 재미를 붙인 독자든 기존의 숙달된 독자든 관계없이 두루 만족할 만한 좋은 소설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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