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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30. 2023

가장 본질적인 가치에 관하여

윤해연, 『빨간 아이, 봇』, 허블, 2021

* 쪽수: 168쪽



윤해연의 『빨간 아이, 봇』은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SF 동화입니다. 인류가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요. 즉 인류가 사라진 자리에서 로봇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이어간다는 설정인데, 이런 경우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인간성의 회복 또는 인류 문명의 복구에 대해 말하게 되지요. 항상 얘기하는 거지만, 그건 인간이 대단히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모두 인간들이 지어내기 때문이고요. SF가 인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가든 결국 기준점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서사의 마디마디에 크건 작건 인간의 자의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빨간 아이, 봇』이라는 제목을 보고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아이, 로봇I, Robot』(1950)을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하지요. 물론 '빨간 아이, 봇'의 '아이'는 '아이, 로봇'의 '아이'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한국어에서 아이는 어린이를 뜻하니까요. 반면 'I, Robot'에서 'I'는 로봇이 자기 존재를 객관적이면서도 실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쓰였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여전히 강력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이왕 딴 길로 샌 김에 조금만 더 가볼까요. 저는 켄 로치Ken Loach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2016)의 제목에서도―영화를 본 날로부터 수년이 흐른 시점이긴 했지만― 아시모프를 떠올렸습니다. 좀 엉뚱한 구석이 있긴 해도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연상작용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말했듯, 전 어떤 작품이 제목에다 'I'를 쓰고 바로 다음에 콤마를 찍는 순간 어느 정도는 아시모프의 자장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갖는 의미는 로봇의 작동 원리와 그에 기반한 로봇의 존재 양식을 기발하게 탐구했던 『아이, 로봇』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욱 명료해지는 측면이 있는 거예요. 아시모프의 로봇이 있던 자리에 인간 다니엘 블레이크를 대입한 이 영화의 과제는, 인간의 실존에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전제를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의미 있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인간의 존엄은 어떠한 원칙에 기반하여 성립하는지, 영화는 매우 명료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요.


윤해연의 『빨간 아이, 봇』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이어가 볼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재미있는 포인트는, 'I,'라는 형식이, 음가가 같은 한국어 낱말을 거쳐 중의적으로 변주되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아이는 '빨간 아이'이고, '로봇'도 '봇'으로 바뀌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워 보이죠. 하지만 이 책의 처음 세 챕터를 보면 역시 『아이, 로봇』을 연상케 하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나이스와 피스', '드림', '팬스'라는 제목의 각 챕터에서 주인공 로봇들의 캐릭터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어요. 이 제목들은 작품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로봇들의 이름입니다. 비슷하게, 『아이, 로봇』의 한국어판 목차를 보면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로봇들의 이름으로 구성된 챕터를 확인할 수 있지요. (물론 이게 다는 아닙니다. 이 작품의 제목에는 단순히 아시모프를 오마주하는 것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이야기의 도입부는 정보화 로봇 '나이스', 청소 로봇 '피스', 돌봄 로봇 '드림', 방어 로봇 '팬스'가 만나 길을 떠나게 되는 사연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연약함과 무용함이 드러나지요. 이들은 모두 고장 나거나 쓸모 없어진 로봇이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결핍을 지닌 존재입니다. 알다시피 이야기의 세계에서 인물이 지닌 결핍은 곧 그 인물의 개성으로 작용합니다. 때문에 이들이 서로를 도우며 힘겹게 여정을 이어가는 모습은 도로시 일행과 브레멘 음악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네 로봇의 목적지는 일차적으로는 '아미로달로'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한 여정을 통해 자기네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이겠고요. 하지만 그들이 탐험할 세계는 이미 폐허가 되었습니다. 거대 인공지능 아미로달로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간은 지구에서 전멸했고 자연은 황폐해졌습니다. 하지만 팬스는 얼마 전까지 자신이 마지막 인류인 빨간 아이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었다고 말하지요. 빨간 아이가 그저 로봇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로봇들은 팬스의 말을 듣고 함께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 맥락에서 아이를 수식하는 '빨강'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면서, 감각적으로도 강렬한 색채 이미지를 형성하지요.


이 이야기의 결말에 따르면, 결국 로봇의 존재 의미는 인간을 떠나서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공적으로 창조된 존재가 스스로 살아있는 존재에 근본적으로 종속된다는 발상은 사실 SF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아이디어이기도 하고요. 동시에 그것은 생명이라는 불가해한 현상에 경의를 표하는 하나의 정형화된 방식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빨간 아이, 봇』은 『아이, 로봇』을 적절히 오마주하면서도 한편으로 '빨간 아이', 즉 인간과 생명이라는 본질적인 가치를 맨 앞에 세워 뚜렷한 메시지를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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