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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May 23. 2023

동화가 아픔을 증언하는 방식

김해원, 『오월의 달리기』, 푸른숲주니어, 2013

* 쪽수: 176쪽



'1980년 5월의 광주를 그린 이야기' 했을 때 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소년이 온다』(2014)입니다. 이건 제가 사는 동안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몇 안 되는 사실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는 건, 아픈 과거의 상흔을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에 불가역적인 형태로 새겨 넣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소년이 온다』를 읽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그것을 읽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경험은 사실상 독자에게 타인이 되어보는 것과 매우 흡사한, 굉장히 놀라운 감각을 남기게 됩니다.


1년에 한두 번쯤 『소년이 온다』를 떠올릴 때면 거의 언제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Bröderna Lejonhjärta』(1973)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정확히는 그 안에 묘사된 세계의 모순이 생각나지요. 이건 일종의 자동재생인데, 두 작품이 제 안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결합된 원인은 물론 한강이 2017년 노르웨이에서 했던 강연문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독을 권하고 싶어요.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전 동화가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위대한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 어렸던 한강에게서 '이상한 열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당시 동화로서는 드물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를테면 죽음과 삶과 고통과 저항,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세계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말입니다.


『소년이 온다』보다 한 해 일찍 나온 김해원의 동화 『오월의 달리기』 역시 그런 변화를 지향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3년 5월 18일에 처음 출간되었고요. 간결하고 단선적인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액자 테두리로 기능하는 현재 시점은 책이 출간된 해인 2013년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도입부 장면은 1980년의 광주로부터 33년이 흐른 시점의 대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죠. 이야기는 한 남자가 광주의 시계방에 찾아와 오래된 회중시계의 수리를 부탁하는 장면에서 시작되고, 이후 곧바로 과거 회상으로 넘어갑니다. 자연히 독자의 시간도 33년 전으로 함께 거슬러 올라가지요.


1980년의 광주, '명수'는 전국소년체전에 나갈 전남 대표 선수를 뽑는 육상대회 경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1번 레인에는 강력한 경쟁자 '정태'가 몸을 풀고 있죠. 잔뜩 긴장한 가운데 천 미터 달리기 경기가 시작되고, 명수는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2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해 전남 대표로 선발됩니다. 명수는 3월부터 곧장 대표팀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의 합숙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입소하는 날, 아버지는 명수에게 새 운동화를 사줍니다.


5.18 민주화 운동을 모르는 어린이 독자가 이 책을 처음 읽는다면, 이 책의 초반부는 전형적인 스포츠 드라마에 10대 소년 주인공의 성장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갈 수가 없지요. 중반 이후 사건 전개의 톤이 급격히 바뀌면서부터, 명수의 일상은 곳곳에서 기이하게 뒤틀리고 가로막힙니다. 스포츠와 성장은 부차적인 소재로 전락하고, '광주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생경한 과제가 당혹스럽게 부여됩니다.


이런 급작스러운 전개가 의미 있게 보이는 이유는,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당혹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기 때문일 겁니다. 독자는 그저 평범한 꿈과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한 소년의 시각에서 당시의 상황을 보게 되는데, 중반 이후 그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입니다. 소년이 소년의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불의한 권력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징하게 보여주는 전개인 것이죠.


하지만 이야기는 폭력과 좌절감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오월의 달리기』는 참혹한 고통에도 끝내 쓰러지지 않고 전진했던 인간들의 존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아는 다른 모든 광주 이야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의 제목이 '오월의 달리기'라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즉, 이 작품에서 달리기는 뛰어난 육상선수였던 소년 명수의 꿈이기도 하면서, 벼랑 끝에 섰던 시민들의 숭고한 의지를 표상하는 행위이기도 한 겁니다. 매년 이맘때쯤 미디어를 통해 습관적으로 흘러나오는 '5월 정신'이라는 말에 담긴 진짜 뜻은, 그날 명수의 달리기에 깃들어 있던 절실함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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