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Jun 11. 2023

돌아오지 말고, 있어야 할 곳으로

『해리엇』과 『긴긴밤』

한윤섭, 『해리엇』, 문학동네, 2011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 2021


위 두 작품에 대해 이전에 썼던 감상을 엮어 한 편의 글로 다듬어 보았습니다. 이하 본문입니다.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그의 저서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에서 '집 → 집에서 떠남 → 모험 → 집으로 돌아옴'의 형태로 도식화되는 형태의 서사를 가장 전통적인 내러티브 플롯이라 언급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집은 안전하지만 즐길 만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물은 떠날 수밖에 없다. 떠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보물을 찾거나 지식을 얻고 성숙한 후에, 인물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주인공이 갖은 시련 끝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이러한 결말은, 불만족스러운 독자의 현실에 어떤 신화적인 안정감을 부여해 준다. 어쩌면 현실은 처음부터 제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렇게 독자는 이야기 속 체험을 통해 내면의 성장을 이룬 뒤 전과 달라진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주인공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갈 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집을 상징하는 공간이 최소한의 안전조차도 제대로 담보할 수 없을 때, 그곳으로 돌아가 안식을 취하는 결말은 독자를 향한 기만이 된다. 그럴 때 이야기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에 피상적 의미만을 남겨두고는, 인물로 하여금 ‘진짜 집’을 찾아 나서게 한다. 그 진짜 집은 종종 인물 간의 정서적 관계 속에서 형상화된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1997)에서 ‘해리포터’의 집은 표면적 층위에서는 ‘더즐리 부부네 프리벳가 4번지’겠지만, 모험을 마친 포터가 돌아가야 할 곳은 ‘론‘, ’헤르미온느’를 포함해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푸른 사자 와니니』(2015)의 ‘와니니’는 처음에 ‘마디바’ 무리의 일원이었지만, 모험을 마친 와니니가 있어야 할 곳은 마디바 무리가 아닌 새로운 와니니 무리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집’의 개념은 인물의 성장과 함께 표층과 심층의 양갈래로 또렷하게 분화된다. 이 이야기들에서 중요한 것은 겉만 번지르르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진짜 집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해리엇』과 『긴긴밤』은 10년이라는 시간 터울에도 같은 결 위에 놓이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이야기들의 도입부에서 중요한 인물은 모두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놓여 있다. 『해리엇』에서 원숭이 ‘찰리’는 사람이 만든 숲에서 태어나 사람의 집에서 살다가 사람이 만든 동물원으로 보내진다. 『긴긴밤』 속 코뿔소 ‘노든’ 역시 사람이 만든 코끼리 고아원에서 태어나 코끼리들과 함께 자란다. 찰리와 노든은 고되고 제한적인 여건 속에서도 다른 동물과 연대하며 매 순간 한 걸음 내딛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를 믿고 지지하며 함께 걷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리고 독자는 결말에서 그 연대와 지지의 결실을 확인하게 된다. 『해리엇』의 결말에서 갈라파고스 거북 ‘해리엇’은 찰리의 도움으로 그리운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고, 『긴긴밤』의 결말에서 펭귄 ‘나’ 역시 노든을 포함한 여러 아버지들의 희생으로 수놓아진 여정의 끝에서 바다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진짜 집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일까.

먼저 『해리엇』을 보자. 이 작품의 결말은 사실 이론의 여지가 있다. 거북 해리엇의 고향은 그가 여러 차례 밝혔듯 갈라파고스이다. 따라서 비글호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해리엇이 다시금 바다로 나아가는 결말은, 어쩌면 인물이 집으로 돌아가는 도식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눈에 띄는 쟁점도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해리엇』이지만 전반부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인물은 원숭이 찰리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찰리가 있고 서사의 흐름도 찰리의 감정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찰리가 해리엇을 배웅한 뒤 동물원으로 돌아오는 결말은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동물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도 끝내 우리로 돌아와 사육사에게 아침을 달라고 외치는 찰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결국 해리엇은 그리운 고향집으로, 찰리는 익숙한 현실로 제각각 돌아가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가 택한 결말일까.

『해리엇』의 첫 문장은 ‘동물원의 밤이 깊어졌다.’이고, 마지막 문장은 ‘동물원의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이다. 나는 이것을 해리엇을 바다로 떠나보낸 찰리가 더 이상 동물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매여있지 않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찰리에겐 여전히 열쇠가 있고, 도움이 필요한 동물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신감도 있다. 찰리의 진짜 집은 그러한 정서적인 맥락 안에서 비로소 구체화된다. 즉, 찰리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주체적으로 동물원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마리아 니콜라예바가 말한 전통적인 플롯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 전통적인 플롯을 넘어서는 전개는 해리엇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해리엇은 찰리의 도움을 받아 고향 갈라파고스로 이어지는 머나먼 바닷길에 첫발을 담근다. 하지만 독자는 그가 물리적으로는 결코 갈라파고스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해리엇에게 남은 수명은 삼일뿐이었고, 그중 이틀은 이미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해리엇에게 주어진 시간은 만 하루도 채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해리엇이 바다로 가는 결말은 그가 고향 땅을 실제로 밟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독립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의미는 해리엇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해리엇의 기억 속 형제들은 모두 인간의 손에 죽어갔다. 해리엇마저 동물원에 갇힌 채로 죽는다면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죽음을 맞는 존재는 적어도 해리엇의 기억 속에는 없게 된다. 다시 말해 해리엇이 바다에서 맞게 될 죽음은, 갈라파고스에서 인간의 손에 죽어간 수많은 동물들에 대한 애도이자 증언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해리엇의 ‘진짜 집’이고, 이는 물론 전통적인 내러티브 플롯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해리엇이 성공적으로 귀환하는 것만으로 다 가려질 수 없는 역사의 문제는 이처럼 극적인 장치에 힘입어 되살아난다.


그들은 수영을 못하면서도 바다에 떠 있었고, 빠르지 않으면서도 앞에 가는 동물을 잡을 수 있었고, 자신들보다 크고 힘이 센 동물들을 쉽게 들어 올리고, 한쪽 손에는 늘 무언가를 들고 상대를 위협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과 가장 달랐던 점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윤섭, 『해리엇』, 문학동네, 2011, 108-109쪽.


사람이 다른 동물과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직립보행, 고등사고력, 도구 사용 능력과 같이 인간에게 뚜렷한 과학적, 역사적 성취를 안겨준 요인을 말한다. 그런데 이 책은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인간이 자체적으로 수립한 기준에 의해 우월한 것으로 검증된 요소들이 정작 다른 동물들의 눈에 얼마나 끔찍하게 보일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갈라파고스 거북은 찰스 다윈이 현대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 할만한 진화론을 체계화한 대작, 『종의 기원』을 쓰는 계기를 제공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1859년 발표 당시에는 폭발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과학계든 종교계든 이제 와서 다윈의 업적을 놓고 다투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다만 각자 제 영역에서 갈 길을 갈 뿐이다. 『해리엇』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다윈과 비글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종차별, 동물학대와 같은 문제를 논쟁의 영역으로 끌고 오지는 않는다. 그저 인간의 빛나는 성취가 다른 동물에게 재앙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묵묵히 보여줄 뿐이다. 이야기 속 해리엇의 온화한 태도는, 사실 이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렇듯 온화하고 다정한 태도는 『긴긴밤』에서도 확인된다. 사실 『긴긴밤』은 작가의 태도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리엇』과 많이 닮아있다. 인간의 존재를 악역보다는 일종의 재앙에 가깝게 묘사한 점, 핵심 인물이 이야기의 중반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 바다를 향해 떠나가는 인물로 결말을 장식한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긴긴밤』에서는 어떤 인물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긴긴밤』의 이야기는 코뿔소 '노든'으로부터 출발하여 코뿔소 '앙가부', 펭귄 '치쿠'와 '윔보'를 경유하여 이름 없는 펭귄인 '나'에게 도착하는 선형적인 로드무비의 형식을 띤다. 또한 이 이야기는 늙은 코뿔소와 어린 펭귄을 주인공으로 하는 버디무비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서술자는 이름 없는 펭귄 '나'이다. '나'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야기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인데, 그 이전까지는 '나'가 노든에게 들은 것을 주로 회상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서술자가 이야기 속 등장인물로 명시되는 건 비교적 앞부분이고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그보다 한참 뒤라는 사실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을 영화처럼 보이게 해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느껴진다. 즉, 이 이야기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거의 완벽하게 로드무비의 문법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노든은 훌륭한 코뿔소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 2021, 22쪽.


하늘의 별을 바라보느라 노든은 알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씩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부리가 껍질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 2021, 76쪽.


이야기는 '긴긴밤'이라는 제목에 맞게 밤의 이미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이 이야기에서 밤은 장면 전환을 위한 장치가 아니고 다음 날을 예비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인물들에게 밤은 그 자체로 관계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이면서, 위로와 연대가 더욱 굳건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노든은 가족과 앙가부를 잃었고, 치쿠는 윔보를 잃었고, 다시 노든은 치쿠를 떠나보냈고, '나' 또한 여정의 막바지에서 노든과 작별인사를 한 뒤 자신만의 바다를 찾아간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긴긴밤의 연대 안에서 하나의 범주, 즉 '우리'로 묶이게 된다. 심지어 한 번도 서로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들이 만났다가 헤어진 수많은 밤들 속에 모든 관계의 기억이 인장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기나긴 밤들의 이어짐 속에서 『긴긴밤』의 결말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나’는 미지의 바다를 향해 혼자서 걸어간다. 그것은 ‘나’보다 앞서서 이 이야기를 걸었던 다른 동물들의 여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바다를 바라보며 독자는 부질없이 묻는다. 만약 노든이 코끼리 고아원을 나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혹은 중간에 집으로 돌아왔다면. 이러한 가정은 겹겹의 불행에 신음하는 노든을 지켜보는 일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독자로서의 고백이기도 하다. 정작 노든은 고아원을 나온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 2021, 18쪽.


이 이야기가 단호한 어조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있어야 할 곳에 있기 위해 걷는 일은 그 과정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후회할 일은 아니다. 그 고통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슬픔을 동반한다고 해도 말이다. 가장 전통적인 플롯의 도식은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해리엇』의 결말이 죽어간 이들에 대한 기억과 애도의 성격을 갖는다면, 『긴긴밤』의 결말은 이전에 걸어왔던 이의 삶을 이어서 걸어 나가는 연대의 성격을 띤다. 어쩌면 이것은 아동문학이 어린이 독자에게 내어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가치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 본질적인 가치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