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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Sep 10. 2023

곰들의 부탁이 들리나요

진형민, 『곰의 부탁』, 문학동네, 2020

* 쪽수: 240쪽



진형민의 소설집 『곰의 부탁』에는 한 번 읽으면 쉬 잊히지 않는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진형민의 작품들은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들로 섬세하게 주제를 드러내는 특징이 있는데, 『곰의 부탁』에서도 역시 그런 장점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전 진형민이 한국어 문장을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섬세하게 구사하는 동화작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진형민 하면 『기호 3번 안석뽕』(2013), 『꼴뚜기』(2013), 『소리 질러, 운동장』(2015) 같은 책들이 금방 떠오르지요. 이것들은 물론 좋은 책인데, 다만 지금 읽으면 셋다 디테일 측면에서 걸리는 지점이 꽤 많아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이 책들이 독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의미해요. 하지만 그 주제에 이르는 동안 거쳐야 하는 과정의 디테일이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죠. 이건 작가나 개별 작품의 문제는 아니고, 그냥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탈락입니다. 과거엔 적절하고 재치 있게 여겨졌던 장면들이 불과 10년 뒤에는 낡고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리죠. 이 시간의 그물을 뚫고 살아남는 작품은 그야말로 극소수인데, 심지어 최근에는 그 탈락의 주기마저 굉장히 빨라졌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으로 목소리를 내어야만 합니다. 달라진 시대는 필연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므로, 작가는 이에 부응하여 시대에 유효한 의미를 알맞게 생성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안에서 작가의 시선을 일관성 있게 드러내어야 하지요. 전 『곰의 부탁』이 그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실린 작품들을 생각나는 대로 소개해볼게요.


표제작 「곰의 부탁」에는 '나'와 '곰'과 '양'이 나옵니다. 나는 여학생이고 곰과 양은 남학생입니다. 셋은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고 있고, 다가오는 학교 축제에 대비하여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곰은 로미오 역이고, 양은 머큐시오 역이고, 나는 무대미술 스태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곰과 양이 손잡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소문이 연습실에 돕니다. 이후 로미오와 머큐시오가 등장하는 장면을 연습할 때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지고, 양은 다음 날부터 연습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곰은 나에게, 함께 바다에 가자고 부탁합니다. 양이 너 가면 같이 가겠다고 했다면서 말이죠.


중간에 모데나의 유골 이야기가 곰의 입을 빌려 의미심장하게 언급됩니다. 2009년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손을 꼭 잡은 채 마주 보고 누운 두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모데나의 연인'으로 불리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고대의 유골들은, 그로부터 10년쯤 뒤에 둘 다 남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리고 '모데나의 연인'은 하루아침에 '모데나의 전사'가 되었지요. 그들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사실 그건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쟁점도 아니었어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편견이 고대의 유골에까지 자의적인 프레임을 씌웠다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곰의 부탁」은 현실의 사례를 인용함으로써 다수의 편견에 존재를 부정당해온 소수자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결말부, 곰과 양과 함께 간 바닷가에서 나는 눈부시게 노란 해를 보게 됩니다. 어릴 때 아무 의심 없이 해를 빨간색으로 칠할 수 있었던 건, 진짜 해를 한 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말이죠. 해는 반드시 빨간색이어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샛노란 해를 보여줌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해를 마주하는 사건이 다름 아닌 곰의 부탁으로 일어났다는 것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지요. 앞으로 우리는 수많은 곰들의 부탁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세상에 어떤 신념도 존재를 부정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으니까요.


「12시 5분 전」의 주인공 '은비'는 다른 학교에 다니는 남자친구 '영찬'과 데이트를 하던 중 지갑 속 콘돔을 떨어뜨립니다. 당황한 두 사람의 데이트는 어색하게 마무리되고, 영찬은 은비를 소개해준 친구 '진주'에게 전화해서 묻습니다. "야, 조은비 학교에서 인기 많냐?"


일개 소품에 지나지 않는 콘돔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들이 청소년이기 때문입니다. 은비의 콘돔을 우연히 본 영찬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도식적이고 일차원적인 인과관계가 그려집니다. 은비는 무언가를 해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고요. 알맹이 없는 갈등에 속을 썩이는 동안 둘의 관계는 점점 밤 12시의 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야기 밖에서 사건을 관찰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상황은 점점 소모적으로 흘러가는데, 결국 이 모든 일이 콘돔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황당하고 허무하기까지 하죠. 요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아직까지 한국 청소년들에게 피임은 금기시되는 지식의 영역입니다. 「12시 5분 전」은 이렇듯 눈먼 금기가 정작 알 권리를 가진 청소년들에게 어떤 식으로 죄책감의 상흔을 남기는지 잘 보여주고 있지요.


「헬멧」은 수년 전부터 사회 문제로 거론된 청소년 배달노동 이슈를 다루고 있고, 「람부탄」은 이란을 거쳐 말레이시아로 건너온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두 작품을 엮어 소개하는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헬멧'은 명목상 청소년 배달노동자의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실질적으로 이 업계에서 노동자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돈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제목은 이른 나이부터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리는 청소년들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도 작은 헬멧에 의지해 곡예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배달노동자들이 도로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은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 「그 뒤에 인터뷰」에서도 인상 깊게 확인할 수 있는데, 스토리텔링 기법과 플롯의 초점에서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저로서는 유사한 소재와 문제의식을 다루는 내러티브가 어떻게 서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지, 그럼으로써 어떻게 서로 다른 의미를 생성해 낼 수 있는지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람부탄'이라는 제목 역시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말레이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열대 과일 람부탄은 아프간에서 온 난민 소녀 '세디게'에게 지독히도 달달한 감각을 안겨주지만, 정작 소녀의 현실은 달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난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내부에서도 여성들은 여분의 억압에 시달려야 하고,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이웃의 무심한 동정에 모멸감을 느껴야만 하지요. 결국 람부탄의 달콤함은 떫은맛의 씁쓸함에 가려 바래지고 맙니다.


한 작품만 더 소개해볼까요. 「언니네 집」의 언니는 이상동기범죄의 피해자입니다. 몇 달 전 서울 변두리에 방을 얻어 독립한 언니가 다짜고짜 나에게 전화를 걸어 방학 때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합니다. 나는 언니가 미리 짜둔 시나리오대로 엄마에게 둘러댄 후 언니에게 가지요. 뜻밖에도 다친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언니는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세게 밀쳐 쓰러뜨린 뒤 발로 밟고 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경찰은 용의자를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매는 어릴 때 마당 있는 집에서 키우던 토끼 '밀크'와 '코코아'를 떠올리지요. 어느 날 밤 토끼장 안에 있어야 할 코코아가 마당 한가운데 있었고, 우연히 잠이 깬 나는 웬 검은 물체가 코코아를 덮치는 장면을 거실에서 목격했습니다. 나의 얘기를 듣던 언니가 말합니다. "후회했을까?" "코코아 말이야. 후회했을까?"


코코아가 그날 토끼장 안에 머물렀다면 검은 물체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이상동기범죄의 피해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날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그냥 집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언니네 집」은 트라우마를 겪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일이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고, 그 일로 인해 후회나 분노와 같은 감정에 자주 사로잡히는 것 또한 피해자의 책임이 아님을 담담한 어조로 전달합니다.


이 글에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자물쇠를 채우지 않은 날」, 「그 뒤에 인터뷰」도 모두 좋은 작품입니다. 『곰의 부탁』은 청소년 소설집으로서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 책이에요. 사실 한 작가의 단편집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유독 튀거나 톤이 따로 노는 작품이 한두 개 정도는 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아요. 각 작품이 다루는 주제와 메시지, 문장의 톤이 모두 일관적이고 한 편 한 편의 길이도 비슷해 형식적으로도 안정감이 있지요. 다 읽었을 때 아주 가지런하게 정돈된 인상을 남기는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 묘사된 장면들이 담고 있는 의미가 풍성하고 개별 독자의 이해와 해석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폭넓게 허용하고 있어서, 읽고 나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무엇보다 이 책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담담하고 차분하게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이 속한 현실을 가만히 짚어주고 있죠. 전 이 책이 보여주는 결말들이 그런 면에서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습니다. 달뜬 희망을 작위적으로 제시하기보다, 그저 눈앞의 한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려주는 데에 집중하는 이런 소설들이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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