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나인』, 창비, 2021
* 쪽수: 392쪽
미국 SF작가협회 초대 회장이었던 데이먼 나이트Damon Francis Knight는 SF의 정의에 대해, "내가 SF라고 부르는 것이 곧 SF"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자기 말만 절대적으로 옳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고, SF를 향유하는 주체의 주관적 경험과 감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말이지요. 실제로 장르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정작 그 장르를 깊이 이해하고 즐기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더디더라도 개개의 작품을 통해 조금씩 경험치를 쌓아나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또 가장 재미있는 방법이지요.
그렇게 경험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 SF 장르가 커버할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SF라고 생각지 못했던 작품들이 SF로 읽힐 여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중 어떤 것은 장르 팬들 사이에서 이미 완벽하게 SF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겠죠. 그런 장르 구분에 동의할 때도 있고, 동의하지 못할 때도 있고, 때로는 이런 구분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이 모든 사소한 깨달음과 볼멘소리와 소모적인 논쟁들이 SF를 둘러싼 논의를 풍성하게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먼 나이트의 저 말 또한, 그런 논쟁 속에서 유기적으로 형성되는 장르 개념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지고요.
SF 장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둘러보면 볼수록, 우리는 이 거대한 울타리가 굉장히 유연하고 가변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고, 그건 다른 장르도 모두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이 장르 바깥에 머물기로 단단히 결심한 듯 보이는 사람들이 'SF란 이러저러해서 다가가기 꺼려진다'라고 말하면 저는 거의 반사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게 됩니다. 반론은 대개 그 사람이 SF에 진입장벽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반례를 제시하는, 매우 손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지요. 생각해 보세요. SF가 너무 과학적이어서 어렵다거나, SF가 너무 유치해서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론을 제기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이겠어요. 게다가 그건 꽤 신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천선란의 장편 『나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서두가 길긴 했지만, 이 작품을 가지고 장르 구분을 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작가도 자기 작품이 장르 경계선을 긋는 도구로 쓰이길 바라진 않을 테니까요. 다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익숙한 내러티브 안에 SF적 설정이나 발상이 얼마나 유연하고 간결하게 삽입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인』은 고등학생 주인공 '나인'이 2년 전에 가출한 것으로 처리된 선배 '박원우'의 실종사건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즉 여기에서는 나인이 일종의 탐정 역할을 하게 되는 건데, 알다시피 미스터리 장르물에서 탐정에 해당하는 캐릭터에게는 보통 눈에 띄게 또렷한 개성이 부여되지요. 이 작품에서 그 개성은 주인공 나인의 정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나인은 '리겔리' 행성에서 지구로 이주한 '누브족'의 후예입니다.
누브족에 대한 가정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겉으로 봐서는 인간과 다를 바 없지만, 태생적으로 식물종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땅에 심은 새싹의 뿌리에서 수개월 동안 양분을 섭취하며 아기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다가 꽃이 피면 뽑아서 기르는 것이죠. '식물형 인간'이란 설정은 단순히 흥미로운 소재로만 그치지 않고, 전체 스토리라인의 중심을 잡아주는 핵심 발상으로 기능합니다. 나인은 자라면서 점차 식물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로부터 박원우 실종 사건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게 되지요. 게다가 나인은 예외적으로 강한 힘을 타고난 누브입니다. 나인은 단순히 식물과 대화를 나누는 수준을 넘어, 빛이 들지 않는 땅에 꽃을 피워낼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나인의 곁에는 다수의 조력자가 있습니다. 나인을 길러준 '지모'부터, 단짝 친구 '미래'와 '현재', 유능한 경찰이자 미래의 엄마인 '경혜', 어느 날 불쑥 찾아와 나인의 정체를 알려주는 '승택', 사라진 원우와 절친했던 '석구', 오래전 일본 순사의 총에 맞아 죽어서 나무에 깃든 영혼 '금옥'까지, 나인이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의 길목에는 수많은 조력자들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주목하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모두 나인을 통해서 터져 나옵니다. 그건 단순히 나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식물성과 그로부터 피어오르는 생명력이 부당하게 묻힌 진실을 드러내도록 강하게 추동하기 때문이지요.
당시 현장에서 사건을 지켜본 식물들이 기억하는 바, 박원우는 가출한 것이 아니라 2년 전 그날 선연산에서 죽은 것이었습니다. 유력한 부모 밑에서 자란 '권도현'은 한때 원우와 태권도장에도 함께 다니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커가면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도현의 입장에서는 틈만 나면 외계인을 만났다며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다니는 원우가 짜증스럽기도 했던 것 같아요. 급기야 도현은 밤늦게 원우를 불러내 다분히 시비조로 말다툼을 벌이다가 실수로 밀쳐서 죽이게 됩니다. 당황한 도현은 그 자리에 원우의 시신을 파묻고, 이후 사건은 도현의 부모에 의해 빠르게 은폐됩니다. 경찰이 원우의 실종을 단순 가출로 급히 종결한 것에도 그러한 내막이 있었던 것이죠.
당사자가 아니고선 알 수 없는 이런 구체적인 정황들은 물론 나인의 능력을 통해 이야기 속에서 명명백백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곧바로 이야기의 결말로 개연성 있게 이어지고요. 이처럼 『나인』은 간결한 SF 설정 하나로 미스터리의 시작과 끝을 안정감 있게 매듭짓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SF에 대한 자잘한 편견들에서 아주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아마 그 점은 책을 읽어보면 더 분명하게 이해될 거예요.
끝으로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아선 안 되겠죠. 이 작품의 결말은 은폐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의 스펙터클을 소름 돋을 만큼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물론 나인이 지닌 생명력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요. 사실 『나인』의 앞쪽 전개는 보기에 따라 느리고 심심한 면도 없지 않은데, 뒤로 갈수록 긴장도가 가파르게 올라가고 그로 인해 응축된 에너지가 결말에서 한 번에 폭발하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나인』이라는 이야기가 오롯이 이 결말을 위해 쓰였다고 생각해요. 저로서는 결말을 보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존재 가치가 빠짐없이 입증되는 수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