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영, 『영원한 페이스메이커』, 별숲, 2023
* 쪽수: 168쪽
주인공 '단호암'은 세계적인 사이클 선수였던 형을 따라 사이클 선수를 꿈꾸는 6학년 어린이입니다. 애석하게도 형은 지난해 사이클 대회를 마친 뒤 돌연 심장이 멈춰 사망했습니다. 엄마는 호암이 아기였을 때 일찍 돌아가셨고요. 아빠는 호암에게 사이클을 타지 말라고 합니다. 죽은 엄마와 형은 모두 심장이 약했는데, 호암도 무리해서 운동하다 잘못될까 봐 겁이 나는 거죠. 하지만 그럴수록 호암은 더욱더 사이클에 몰두합니다. 급기야 호암은 아빠 몰래 '새벗 팀 사이클 대회'에 다섯 명으로 된 팀을 꾸려 참가합니다.
팀 사이클 대회를 치르면서 몇 번의 위기가 찾아오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팀원들은 서로의 중요한 사연을 하나씩 알아갑니다. 자연히 우정은 깊어지고 팀원 간 호흡도 조금씩 나아지지요. 그러다 호암의 아빠가 호암의 대회 출전 사실을 알게 되고 둘 사이에 격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호암은 꺾이지 않고 팀원들과 함께 완주에 성공합니다. 이후 아빠와의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되면서, 호암은 질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게 되지요.
이렇게 요약하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가 됩니다. 이번엔 조금 다르게 설명해 볼까요. 평범한 초등학생 5명이 한 팀이 되어 출전하는 이 대회의 코스는 총 스무 개이고, 팀원들은 상의를 통해 그중 하나를 골라 함께 달려야 합니다. 결승선까지의 거리는 코스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무려 90-95Km에 달하고요. 주인공 팀은 7번 코스를 택하는데, 이 코스에는 정체불명의 산길이 나오고, 동굴도 나오고, 폐광도 나오고, 정글도 나오고, 늪지의 아나콘다도 나오고, 심지어 호암의 죽은 형도 나옵니다. 맞아요. 호암이 출전한 대회는 VR 사이클 대회이고, 『영원한 페이스메이커』는 SF 동화입니다.
동화에서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존재하지 않던 옵션을 어린이들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영원한 페이스메이커』에서 호암의 팀은 사이클을 타고 하늘을 날기도 하는데, 그 순간의 감각을 묘사하는 방식이 기존 판타지 동화의 문법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냥 두둥실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인물들이 힘껏 사이클 페달을 밟아서 하늘 위를 트랙처럼 달리게 하죠. 그런 설정이 가능한 건 이 작품이 고도로 발달한 VR 기술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요. 그 결과 이 세계의 어린이들은 오로지 자기네 힘만으로 늪지의 아나콘다와 맞설 수도 있게 됩니다. 모험의 질감과 스케일이 한 번에 달라지지요.
가상공간이나 메타버스를 주요하게 활용하는 작품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중심인물들이 VR 세계 안팎에서 상이한 삶의 여건에 놓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시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에 핵심 재료로 쓰이죠. 호암의 팀원인 '기찬오'는 유치원 때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로봇 다리를 갖게 되었고, 또 다른 팀원 '나서지'는 여섯 살 때 보육원에 맡겨졌습니다. 팀장인 호암 역시 형을 떠나보낸 상실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고요. 심지어 '홍유'는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입니다. 팀 사이클 대회의 주최 측에서 프로그래밍한 가상의 캐릭터죠. 그러나 이런 사연들은 VR 세계 안에서 말끔하게 소거되기 때문에, 인물들은 그저 한 팀으로서 주어진 목표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들 사연을 중간중간 간결하게 삽입함으로써 서사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동시에 사회적 메시지 또한 알맞게 녹여내고 있지요.
작품의 결말에서 주인공 팀원들은 '대회 3등'이라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 성과로, 누군가는 그만둘 뻔했던 사이클을 계속할 수 있게 되고, 누군가는 엄마가 볼지도 모르는 인터뷰 영상을 찍게 되고, 누군가는 과거의 그늘로부터 한발 나아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라이딩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각자의 사연과 목표를 가지고 대회에 참가했던 팀원들이 더 큰 하나의 목적을 향해 힘껏 페달을 굴린 결과, 다 같이 유의미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죠. 스포츠 성장물이자 그룹 모험담으로서 작품의 지향점을 잘 살린 훌륭한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