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경,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 사계절, 2020
* 쪽수: 252쪽
고등학교 1학년 '정지석'과 '이새봄'이 주인공인 청소년 장편소설입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 딕Moby-Dick』(1851)이 작품 전반에 걸쳐 핵심 레퍼런스로 쓰이는데, 이게 굉장히 독특한 인상을 남깁니다. 사실상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모비 딕』에 대한 작가의 감상으로 채워져 있고, 그래서 독자로서 조금은 의아해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보통 청소년 장편소설을 읽을 때 이 정도로 설명적인 독후감을 기대하지는 않으니까요.
이 작품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재는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에 관한 아이디어가 워낙 선명해서 처음에 저는 주인공 새봄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인물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고요. 대신 세월호 사건을 가깝게 경험한 대다수 한국인의 트라우마가 삽입됩니다. 다만 이 작품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관념적이에요. 독자에 따라선 현학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청소년 소설에서 이런 시도는 상당히 낯설고 전 그래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장르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의 핵심 정체성은 로맨스에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요. 지석과 새봄은 여느 고등학생과는 아주 다른 아이들입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고 나눈 대화로 로맨스를 쌓아나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들의 비범함은 충분히 입증되지요. 저는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판본을 가지고 있는데, 쪽수를 확인해 보니 730쪽에 달하는군요. 지석은 새봄의 권유만으로 이 대작을 엿새만에 독파합니다. 전 이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보통의 로맨스가 독자를 설레게 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설레게 하지도 않지요. 그러니까 이 작품이 연출하는 로맨스의 초점은 '성'이 아니라 '앎'에 있는 거예요. 주인공들은 상대방과 서서히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열렬히 책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해요. 이 작품 안에서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질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책을 사랑할 이유는 차고 넘치죠.
지석과 새봄은 독서할 때 감정적인 몰입도가 매우 높은 독자들입니다. 극도로 감명 깊은 장면을 읽었을 때 소리를 지르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지요. 그건 물론 이들이 지나온 특정한 삶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데, 책은 그러한 감정적 경험을 우아하게 자극함으로써 이들이 상처로부터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사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와 비슷하게 강렬한 독서의 기억을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지요. 구체적인 반응은 다르게 나타나겠지만요. 독자는 지석과 새봄을 이어주는 『모비 딕』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동시에 내 인생의 책은 무엇인가를 떠올려 보게 됩니다.
이야기는 지석과 새봄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1장은 지석의 시점이었다가 2장은 새봄의 시점이 되고, 3장은 다시 지석의 시점으로 돌아오는 식이죠. 이런 형식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하나의 사건을 둘 이상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에서 사건이라 할 만한 요소들은 전부 과거의 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두 주인공의 현재는 대부분 독서와 대화로만 채워져 있죠. 심지어 그 대화의 절반 정도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이들의 현재가 일종의 정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봄, 엄마의 죽음과 세월호 사건을 잇달아 경험한 새봄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정체되었던 주인공이 독서와 대화를 통해 과거의 상흔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현재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힘을 얻는 회복의 서사인 것이죠.
이 이야기가 상처받은 청소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는 것은 작품의 메시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지석과 새봄의 만남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은 『모비 딕』이라는 책이었고, 이것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위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둘의 미래는 다시 의미 있는 사건들로 채워지게 되겠지요.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책을 통해 회복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다시 누군가에게 전하면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자는 것이죠. 이것은 어쩌면 책이라는 사물이 지닌 속성에 대한 가장 낭만적인 해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책을 읽음으로써 의미가 발생하는 관계란 다름 아닌 작가와 독자의 관계이기도 해서, 그런 면에서도 지석과 새봄의 이야기는 오롯이 책과 작가에 대한 애정 어린 오마주로 보이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