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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Nov 15. 2023

상처로부터 한 발을 내딛기 위해

이꽃님,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문학동네, 2023

* 쪽수: 192쪽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의 이야기는 유도를 좋아하는 열일곱 살 '하지오'가 유도로 유명한 정주군 번영읍으로 이사를 가면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지오는 미혼모인 엄마와 둘이 살아왔는데, 엄마가 암에 걸리면서 아빠가 사는 곳으로 보내진 것이죠. 문제는 지오가 그동안 아빠의 존재를 전혀 모른 채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아빠는 번영에서 임신한 아내와 함께 살고 있고요. 그러니까 지오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사실상 모르는 아저씨네 집에서 얹혀살게 되는 겁니다.


또 다른 주인공 '유찬'은 번영에서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유찬에겐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여기엔 중요한 사연이 있습니다. 5년 전 부모님이 화재로 사망한 이후 갑자기 유찬의 귀에 타인의 속마음이 들리게 된 것이죠. 유찬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들어야 합니다. 때로 그 소리는 감당하기 힘든 소음이 되어 유찬을 괴롭게 하죠. 유찬은 이 능력을 '저주'라 부르며 시종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런 지오와 찬이 만나면서 예측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오의 마음이 찬에게 들리지 않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지오와 함께 있으면 찬의 능력 자체가 작동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들리지 않게 됩니다. 즉, 찬의 능력은 지오 곁에 있을 때 무력화됩니다. 혼란스러워진 찬은 지오에게 강한 의구심과 호기심을 품게 되지요. 스테프니 메이어Stephenie Meyer의 『트와일라잇Twilight』(2005) 도입부와 유사한 설정입니다.


지오와 찬은 모두 가족과 관련된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이 저주라 여기는 특별한 능력이 지오에 의해 무력화되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지요. 한 사람의 상처가 비슷한 상처를 지닌 다른 사람에 의해 치유될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야기는 두 주인공 간 심리적 거리를 차츰 좁혀가면서 그들 내면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줍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두 주인공의 상처에 얽힌 사연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안에 악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지오는 아빠가 17년 전 임신한 엄마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아빠는 그저 겁 많은 미성년자일 뿐이었습니다. 지오를 혼자서 낳아 키우기로 한 것도 엄마의 선택이었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오가 아빠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빠가 비열하고 초라한 악인인 것보다는 낫지요.


유찬도 마찬가집니다. 유찬의 부모님을 사망에 이르게 한 화재 사건은 정황상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 '이새별'이 근처에서 피운 불이 번져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지요. 새별은 두 동생을 키우는 소년가장이면서, 유도를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유도 유망주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형편에 어떻게든 유도를 계속하기 위해 묵묵히 할 일을 해내는 듬직하고 성숙한 인물이죠. 그런 새별이 당시에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운 이유는 ‘추워서’였습니다. 그 불이 번져 유찬의 집을 덮쳤다는 걸 알고 자수한 새별을 감싸주기로 한 건 그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힘을 모았던 마을 어른들이었고요. 그렇게 사건은 단순 사고로 종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악인이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아무래도 좀 위험하죠. 어쨌거나 지오의 아빠는 지오의 엄마를 임신시킨 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찬의 집에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도 표면적으론 대가를 치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단죄하고 응징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이야기는 ‘당사자성’을 끌어옵니다. 상처를 준 이가 끊임없이 참회하고, 상처받은 이가 그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화해도 결국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것이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을 내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요. 작품의 후반부는 바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오의 아빠는 지오에 대한 죄책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고, 새별 역시 밤마다 찬의 집 앞에 찾아와 결코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을 하고 가지요. 이들의 진심 어린 반성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찬의 능력을 통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끝으로 이 작품이 지오와 찬의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지오는 솔직담백하면서 씩씩하고, 찬은 내내 무뚝뚝하다가 한 번씩 임팩트 있는 한 마디를 던져 지오를 설레게 하지요. 독자가 볼 때 이들의 감정은 명백히 쌍방인데, 정작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질투하거나 초조해합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이 소위 썸을 타는 단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짜릿하고 흥미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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