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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감성으로 빚어낸 몽상가적 스토리텔링

신수원, <유리정원>, 2017

by 달리

* 스포일러 : 중간




영화 <유리정원>은 신비로운 나무의 선형과 초록의 색감으로 그득하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자연의 이미지가 스크린을 채우며 내내 도도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유리정원>은 사실 그리 평온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모종의 불안감이 깃든 정서가 영화 전반을 압도하며 관객의 긴장을 팽팽하게 끌어당긴다. 정적인 자연의 이미지와 역동적인 불안의 정서 속에서 균형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운 관객들은, 잠시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끝까지 몰입할 수밖에 없다.


영화 <유리정원>은 나무의 선형과 초록의 색감으로 가득하다.(출처 : 영화 <유리정원> 스틸컷)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상징하는 숲 속 어딘가 깊숙이, 재연(문근영)의 유리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유리정원은 외부 세계로부터 상처받고 움츠러든 재연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택한 도피처다. 재연의 내밀한 세계를 상징하는 순백의 유리정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과 다소 차이가 난다. 정원이라기보다 어느 기이한 과학자의 연구실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 깊은 숲 속의 유리정원은, 재연이 연구 중인 인공혈액과 관련된 실험 도구들로 가득하다. 깨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공간은 재연의 불안한 내면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깊은 숲 속의 유리정원은 재연의 불안한 내면을 상징한다.(출처 : 영화 <유리정원> 스틸컷)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생체에너지 연구소를 이끄는 교수 상호(서태화)와 연구원 재연이 서로를 향해 한 번씩 주고받은 이 대사에서, 우리는 인간의 순수한 내면이 오염되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새하얀 우유에 검은 물감을 한 방울만 섞어도 전체가 어두워지는 것처럼, 상호를 연모하던 재연의 마음도 단 한 번의 상처에 까맣게 타들어가고 만다. 재연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순백의 유리정원이 그토록 불안하고 여리게 묘사된 것은, 언제든 검게 오염될 수 있는 인간 내면의 유약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유약한 순수함은 언제든 검은 증오로 돌변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지닌다. 재연이 자신을 배신한 상호를 저주할 때의 숲은, 영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초록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인다.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연구를 지속하던 재연에게 무명작가 지훈(김태훈)이 찾아오면서 이야기의 전개는 전환점을 맞는다. 지훈은 우연히 재연의 삶을 엿보게 되고, 이를 소재로 한 소설 '유리정원'을 인터넷에 연재함으로써 유명세를 탄다. '나무에서 태어난 소녀'라는 독특한 콘셉트에 사로잡힌 지훈은 초록의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재연의 삶을 계속해서 훔쳐보려 하고, 이는 위태로운 재연의 내면에 다시 한번 파장을 일으킨다. 급기야 재연의 삶을 추적하던 지훈이 정원 뒤편에 놓인 동굴을 발견하면서 서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동굴에는, 극히 사적인 유리정원에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던 재연의 추하고 초라한 진실이 담겨있다. 의식적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을, 재연은 순백의 정원이 아닌 어두운 동굴에 가둬두었다. 가끔 꺼내어 정원으로 가져와 손질하고 다듬어보지만 결국 '그것'이 있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동굴이다. 지훈은 재연의 비밀스러운 삶을 들여보다 동굴 속 진실을 맞닥뜨리게 되고, 눈앞에 펼쳐진 경악스러운 광경 앞에서 소설 '유리정원'을 이어갈 의지를 잃고 만다.


숲과 정원과 동굴. 영화는 색채 이미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초록의 숲은 평온함과 생명을, 백색의 유리정원은 재연의 순수함과 여린 내면을, 어두운 동굴은 재연의 무의식에 자리한 원초적 욕구를 암시한다. 정원에서 재연은 줄곧 외발에 창백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동굴 속 재연은 생기 넘치는 고혹적인 얼굴로 겁에 질린 지훈에게 소설을 계속 써달라고 말한다. 이렇듯 영화는 재연이라는 캐릭터와 공간의 이미지를 긴밀하게 연결 지음으로써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영화 <유리정원>의 차별화된 인상은 무엇보다도 비주류 감성으로 빚어낸 몽상가적 내러티브에 있는 듯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영화는 정적인 이미지와 동적인 불안감(흔들림의 정서)의 낯선 조합으로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선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학과 판타지의 결합은 흔히 엄밀한 과학적 원리를 반영한 공상과학의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유리정원>은 공상과학 영화와 거리가 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학적 소재들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지만 그 안에서 조금도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는 과학적 개념을 차용하여 소재로 삼았음에도 그 원재료의 속성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는다. 일면 반지성적이기까지 한 이 영화의 형식에서, 과학과 판타지의 이종교배는 결국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불안 요소로 기능한다. 거기에 숲과 유리정원과 동굴의 서로 다른 질감, 초록과 백색과 암흑의 시각적 기능까지 중첩되면서 영화는 한순간도 정신적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접해본 적 없는 혼란스러운 불협화음 속에 나 홀로 관객이 된 기분이다. 힘 있는 몽상가의 스토리텔링이란 이리도 깊은 잔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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