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평론》 2024년 겨울호(통권 193호) - 이 계절의 비평
남우비, 「걱정 요정의 첫 임무」
최정숙,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
윤경, 「우주특공대 박동수」
1. 들어가며
현실과 구분되는 개념으로서 환상Fantasy 또는 환상성은 아동문학에서 주요한 연구 분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한국 아동문학의 태동기부터 한 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환상은 아동문학을 이해하는 핵심 통로로 기능하였다. 이는 본질적으로 어린이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현실을 구성하는 촘촘한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자주 환상의 도움을 받아 세계를 주관적으로 재구성한다.
환상에 대한 관심은 연구자의 방을 넘어 어느덧 대중적인 장르론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오늘날 판타지는 개별 작품에 나타난 특징적 발상을 지칭하기보다 여러 작품을 느슨하게 아우르는 울타리로서 보다 요긴하게 작동한다. 독자는 판타지 장르에 속하는 일군의 작품들에서 마법사와 드래곤, 거인과 몬스터와 말하는 동식물과 작은 요정들이 등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 신비로운 존재들은 판타지의 장르 규범 안에서 자기네 자리를 매우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현실의 이면에 신비로운 2차 세계가 별도의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아이디어는, 그 세계로부터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뻗어 나올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 되었다. 어린이 독자는 동화의 주인공을 따라 완전히 새로운 환상의 세계에 입장할 수도 있고, 매일 오가는 일상 공간에서 뜻하지 않게 요정이나 마법사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큰 틀에서 방법은 둘이다. 내가 그들의 세계로 떠나거나, 그들이 나의 세계로 찾아오거나. 표면적 층위에서 먼저 이동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판타지의 방향성이 일차적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
국내에서 ‘판타지 동화’라는 라벨이 붙는 작품들은 대개 전자의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기본적으론 모두 앨리스의 후예다. 이들은 이야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식당, 도서관, 문구점, 박물관, 백화점 등의 눈에 띄는 공간을 발견한 뒤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문 너머 세계는 익숙한 현실과 전혀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보통 판타지의 독자들은 익숙한 현실과 구분되는 ‘저쪽 세계’를 지탱하는 규칙과 질서를 통틀어 ‘세계관’이라 부른다. 21세기 한국 판타지 동화의 인상은 이렇듯 이질적인 세계관의 이미지와 더불어 독자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반드시 거대하고 신비로운 세계관을 경유해야만 판타지가 성공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더없이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에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판타지 세계관에 속한 누군가가 주인공 개인의 일상에 틈입하는 것이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아동문학장에서 본격 판타지로 인식되지 않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어린이 독자의 내면에 자리 잡은 환상성을 조명하는 데에 묵묵히 제 몫을 해내고 있다.
예컨대 제4회 사계절 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김성운의 『행운이 구르는 속도』(2024)에 등장하는 ‘마람 언니’가 하나의 표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에서 온 마람 언니는 주인공 하늘이에게 자신이 램프의 요정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라크식 농담일 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하늘이는 마람 언니를 통해 소원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 지점에서 리얼리즘과 판타지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게 재편성된다. 마람 언니는 정말로 환상의 나라에서 찾아온 요정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늘이가 품고 있는 간절한 바람의 동화적 은유일 수도 있다. 결말부에 이루어지는 하늘이의 소원 역시 현실적으로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독자는 현실과 환상의 두 갈래 길에서 확정되지 않은 선택지를 손에 쥔 채로 책을 덮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작품들에서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최종 경계를 긋는 일, 그럼으로써 이야기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현실과 환상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서로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하는 동화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그럼으로써 어린이의 내면에 주관적으로 형상화되는 세계의 풍경을 더듬어 살펴보기로 한다.
2.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남우비의 「걱정 요정의 첫 임무」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의 걱정을 모으는 요정 ‘술술이’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베테랑 선배 요정인 술술이는 막 첫 임무를 맡아 잔뜩 긴장한 어느 후배 요정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요약하면 술술이가 첫 임무를 맡은 날 큰 실수를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위기를 넘겼다는 내용이다.
첫 임무라 걱정된다고? 하하, 그래! 걱정 요정에게도 걱정은 있는 법이니까. 나도 그랬었어. 선배들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줘도, 처음은 언제나 떨리잖아. 그런데 그거 알아? 지금은 완전히 베테랑인 나, 술술이도 첫날 실수는 아주 무시무시했다는 거. (……)
남우비, 「걱정 요정의 첫 임무」, 《창비어린이》 2024년 가을호, 69쪽
술술이는 첫 임무 때 걱정 많기로 유명한 ‘연이’네 집에 갔다가 옆에 있던 강아지 ‘밤이’에 놀라 걱정 보따리를 떨어뜨린다. 술술이가 그날 하루 동안 보따리에 모은 걱정들은 그대로 연이에게 쏟아지고, 안 그래도 걱정 많은 연이는 다른 사람의 걱정까지 떠안게 된다. 자기가 저지른 실수에 당황한 술술이는 텅 빈 보따리를 들고 도망쳐 나오지만 차마 요정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음 날까지 종일 연이를 따라다니며 지켜본다.
술술이가 바라보는 연이의 하루는 정작 독자의 눈에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연이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문제 풀이를 시킬까 봐 떨고, 이어달리기 선수 뽑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잘하는 친구 ‘소민이’를 곁눈질하며 주눅 든다. 방과 후에는 엄마와 함께 밤이 예방접종을 맞히러 동물병원에 가고, 저녁에는 밤이와 산책을 하다 우연히 소민이를 마주친다. 연이의 하루가 걱정으로 가득하게 된 것은 물론 술술이가 저지른 실수와 무관하지 않지만, 독자가 보기엔 그저 평범하게 소심한 친구의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처럼 ‘현실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주인공의 일상을 다룰 때, 판타지의 장르 관습은 종종 불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촉발되는 개인의 문제를 조명하는 일은 리얼리즘의 익숙한 사명이다. 연이의 이야기에 이 명제를 적용해 본다면 요정이 설 자리는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해도 이야기는 성립할 수 있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리얼리즘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많은 동화가 실제로 비슷한 일들을 해왔다.
다만 그런 경우에는 다루는 문제에 대한 해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다루는 동화가 어른 조력자를 통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건 굳이 동화가 아니라도 자주 겪게 되는 뻔하고 재미없는 일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부분적 결합은 꽤나 유용하다. 「걱정 요정의 첫 임무」의 결말을 보자.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잘은 몰라. 그날 밤은 연이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거든. (……) 지금 생각해 보면 걱정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걱정하는 마음이 결국 연이도, 소민이도, 밤이도, 그리고 나도 도와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을 미워하지는 마! 좋아, 너한테도 주문을 걸어 두어야겠다. 다 풀려라, 술술!
남우비, 「걱정 요정의 첫 임무」, 《창비어린이》 2024년 가을호, 75쪽
사실 연이의 에피소드에서 요정이 한 일이란 실수를 저지른 뒤 안달하며 연이를 따라다닌 게 전부다. 요정은 능숙하지 않고 어른스럽지도 않다. 이 작품에서 연이와 요정은 현실과 환상을 가르는 가상의 벽 양쪽에서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듯하고, 실은 그것이 언뜻 평범해 보이는 연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기도 하다. 결말에서 술술이가 짐짓 의젓한 투로 훈계 비슷한 걸 해도 고깝게 들리지 않는 건, 그가 어른보다는 연이 또래의 어린이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의 결말이 보여주는 유의 낙천적 해법은 서툰 요정이 스토리텔러로 나설 때에야 비로소 납득 가능해진다.
흥미롭게도 이야기는 시작과 끝에 각각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있다. 이야기를 여는 질문은 ‘첫 임무라 걱정된다고?’이고, 이야기를 닫는 질문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이다. 술술이는 앞의 질문에 ‘나도 그랬다’고 답하고, 뒤의 질문에는 ‘나도 모른다’고 답한다. 그러니까 당신, 곧 어린이 독자가 이야기의 시작 지점에서 얼마나 심각한 걱정을 가슴에 품고 있든 ‘나’는 그것을 이상하거나 유난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과거 어느 때에는 그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야기의 끝 지점에서 무슨 결론을 내리든 ‘나’는 당신을 부정하거나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일지는 온전히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으므로,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당신이 다시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뿐이다. 마지막의 ‘다 풀려라, 술술!’이란 주문은 그런 진심 어린 응원의 의미로 읽힌다. 경쾌하면서도 밀도 있게, 어린이 독자를 응원하는 오롯한 끝문장이다.
3. 어린이의 세계와 환상
최정숙의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층 더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서술자는 어린 ‘민지’다. 민지는 군대에 간 열세 살 터울의 오빠를 생각하고 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민지는 실어증 증세를 보이며 오빠에게만 의지했다. 오빠는 수차례 입대를 미뤄가며 민지를 보살폈고, 덕분에 민지는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민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오빠를 군대에 보내주었지만 아직 두려움이 남아있다.
이 작품에서 판타지의 연출 기법은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 연극 무대의 소품처럼 짤막하게 사용된다. 민지는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흰 도화지에 웃는 오빠를 그린다. 그림 속 오빠에게 손을 뻗자 어느새 민지도 도화지 속에 들어와 있다. 자신을 부르는 오빠에게 반갑게 달려가는데 옆에서 같이 손을 흔들고 있는 엄마 아빠가 보인다. 그림 속에서 민지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부모님을 만나 사랑한다고 말한다.
‘엄마, 아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화가 났다. 마음은 저만치 달려가는데 다리는 얼어붙어 움직일 줄 몰랐다. 엄마 아빠가 사라질 것 같아 애가 탔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오빠랑 부모님이 내 옆에 다가와 안아 주었다. 포근한 품속으로 자꾸만 자꾸만 파고들었다.
“민지야, 잘 있었니?”
(……)
“엄마 아빠 사랑해요.”
최정숙,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 《아동문학평론》 2024년 가을호, 139쪽
이는 물론 민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의 서사적 표현으로 보이고, 실은 그렇게 이해할 때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더 매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에 삽입된 환상에 관한 모티프는 민지가 상처와 불안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놓인 은유적 장치로 해석된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난 뒤의 민지는 독자의 눈에 사뭇 달라 보인다. 오빠 외에는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던 민지는 결말에서 ‘가족을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자꾸만 입술이 달싹거’리는 사람이 된다. 결국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지가 스스로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서의 환상’이고, 이 환상은 흔히 말하는 공상이나 몽상과는 아주 다른 각도에서 민지의 현실에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작품이 건네는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는 민지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판타지 없이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 묘사된 환상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현실적인 구속력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었을 때, 민지가 그림 속에 들어가는 시점과 나오는 시점의 서술은 자못 흥미롭다. 그림을 그리기 전 민지는 빈 도화지를 가만히 응시한다. 이는 민지가 자기만의 환상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수행하는 고도로 개인적인 의식이다. 대상에 깊이 몰입함으로써 자기 내면에 자리한 주관적 진실을 마주한 민지는 가족과 교감하고 상처를 치유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때 민지를 현실로 불러오는 주문은 교실을 채우는 친구들의 천진한 웃음소리다. 친구들은 ‘창수’가 졸라맨을 그렸다면서 까르르 웃고, 그 웃음소리를 들은 민지는 연필을 멈추고 제가 그린 그림을 바라본다.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렇듯 그림 속 가족을 바라보는 민지의 내면으로부터 극적으로 완성된다.
이것은 환상과 현실에 대한 어린이의 이해를 섬세하게 반영한 결말이다. 어린이의 내면에서 환상과 현실은 생각만큼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며, 반드시 대립하거나 경합하는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외려 이들은 어린이가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세계의 갈라진 틈 사이를 메우는 보완적 도구로서 보다 유용하게 기능한다. 앞으로 우리가 동화에 구현되는 판타지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도 그것이 얼마나 정교하고 세련되게 한 세계관을 구축하였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린이의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어떤 현실을 지향하고 있는가이다.
4. 환상과 현실의 시간
윤경의 「우주특공대 박동수」의 주인공은 우주특공대원이 꿈인 ‘동수’다. 동수는 ‘세상의 모든 헬멧’이라는 헬멧 가게에 하루도 빠짐없이 들러 헬멧을 구경한다. 가게의 주인아저씨는 그런 동수의 꿈과 의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아저씨 있잖아요…….”
“네 꿈인 우주특공대가 되려면 우주선을 타야 하고, 우주선을 타려면 우주복을 입어야 하고, 우주복에는 우주인 헬멧이 있고, 그래서 너한테 저 헬멧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지? 참, 그리고 네 이름은 박동수고 예약 1번 박동수 까먹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지?”
윤경, 「우주특공대 박동수」, 《열린 아동문학》 2024년 가을호, 68-69쪽
아저씨는 창고에서 우주인 헬멧을 꺼내 와 동수에게 1시간 동안 빌려준다. 예상치 못한 행운에 신이 난 동수는 얼른 헬멧을 쓰고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밖으로 나간다. 바로 이 지점부터 작품 속 환상이 인상 깊게 펼쳐진다. 우주인 헬멧을 쓰고 본 동수의 세상은 마치 다른 행성의 풍경을 보는 듯 새롭다. 헬멧 속 시야에서 나무는 기다란 촉수가 달린 생물이고, 신호등은 눈알이 세로로 박힌 외계인이며, 자동차는 거대 우주 딱정벌레다. 매일 오가던 익숙한 거리의 풍경은 헬멧을 쓰는 것만으로 즐거운 모험의 세계로 탈바꿈한다.
헬멧을 쓰자 세상이 외계 행성으로 바뀐다는 동시적 발상은 동수의 무구함에 힘입어 한층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어느새 꿈꾸던 우주특공대원이 된 동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도우려 하지만 쉽지 않다. 동수의 생각과 달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1시간 동안 아무도 돕지 못한 동수는 힘없이 헬멧 가게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은 1시간 전처럼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 동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걷습니다. 평범한 공원 산책길을 걷고, 평범한 비둘기 떼를 피하고, 평범한 신호등 옆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평범한 자동차 앞을 지나고, 평범한 가로수가 있는 ‘세상의 모든 헬멧’ 가게 앞에 도착합니다. 아쉬운 눈길로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갑니다.
윤경, 「우주특공대 박동수」, 《열린 아동문학》 2024년 가을호, 73쪽
세계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환상이 되기도 하고 현실이 되기도 한다. 어린이가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세계 역시 그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바에 따라 시시각각 재구성된다. 겨우 1시간 간격을 두고 마법처럼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동수의 이야기는 그러한 세계의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물론 이야기는 단순히 그것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게로 돌아온 동수는 주인아저씨를 불러보지만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온다. 아저씨가 1시간 전에 우주인 헬멧을 꺼내 왔던 창고에 갇힌 것이다. 아저씨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동수는 침착하게 책상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를 가져다 아저씨를 구출해 낸다. 아저씨는 ‘우주특공대 박동수’에게 엄지를 치켜세우고, 풀이 죽었던 동수도 그제야 헬멧 안에서 씩 웃는다. 그렇게 이야기는 어린이를 한껏 환대하며 환상적으로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가 판타지의 장르 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면서 동시에 어린이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이런 작품을 통해 어린이는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내내 따뜻한 관심을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어른은 제 주변의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배울 것이다. 어린이의 하루를 조금 더 소중한 기억으로 채우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의 하루가 환상과 현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 어떤 버전으로 막을 내릴지 우리는 미리 알 수 없다. 그저 건조하게 지속되는 일상 가운데 잠깐이나마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그런 소박한 환상이 그들 마음 한구석에 들어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러니 어스름한 저물녘을 어린이와 동화가 있는 세계에서 보내보면 어떨까. 하루의 끝을 궁금해하며 ‘환상과 현실의 시간’을 따로 마련해 두는 것만으로, 어린이의 하루는 조금 더 특별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