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익숙한 질문이다. 근대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의 한 페이지를 인상 깊게 장식한 텍스트들은 대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환원된다. 그 이전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텍스트들―이를테면 신과 영웅들의 장구한 서사시와 같은―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필부들의 후예는 이 물음을 따라 제 존재의 의미를 손수 일구어냈다.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며 여전히 강력하다. 현대인은 한 명 한 명이 끊임없이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묻는 종이라는 점에서 중세 이전의 인간들과 눈에 띄게 구별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양상은 적잖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자기네 존재가 개개인으로선 기대했던 만큼의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결론점에 도달해가고 있다.
결론은 질문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의 시작이다. 개인의 의미가 그리 대단치 못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우리’라는 울타리로 복귀하고 있다. 전체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지만, 전체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속한 개체의 가치를 극대화해줄 수 있을 거란 믿음에서다. 대체불가능한 존재의 의미를 묻던 질문은 이 시점에서 한 차례 미묘하게 수정된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과학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최근 인문학과 과학의 전방위적 결합도 이런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기원을 찾기 위해 거꾸로 돌린 가상의 시계는 어느덧 우주 탄생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인간 역사를 우주적 시간 위에서 조망해 본다면, ‘나’란 존재는 개인 차원에서 아무리 작고 하찮더라도 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며 경이롭게도 그것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광막한 우주 어딘가에 극소한 질량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을 관조하는 상상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의미 발견의 여정과 사뭇 다른 감각을 남긴다.
여기에서 다루어볼 만한 문제가 파생한다. 주지하는바 인간은 무한한 공간을 채우는 유한한 질량이며,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다른 존재도 모두 마찬가지다. ‘나’라는 개인의 의미가 기대했던 만큼 대단치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종 역시 다른 종에 비해 딱히 여분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우주 그 자체만큼 신비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반드시 ‘누구’여야만 한다는 자의식에서 빠르게 이탈할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질문은 다음과 같이 재차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지극히 사사로운 대답이 될 것이다.
2. 사이보그의 존재론
제10회 한낙원과학소설상 대상 수상작인 김문경의 「시간 속의 너에게」(사계절, 2024)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몸이 전부 기계가 된다면 그건 나일까. 글쎄. 기억이 남아 있다면 나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그럼 기억이 나인 걸까.
김문경 외, 『시간 속의 너에게』, 사계절, 2024, 22쪽
이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사고 실험은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다. 요는 테세우스의 배를 이루는 부품이 수 세기에 걸쳐 모두 교체되었다고 했을 때, 이 배를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개념은 김문경의 작품에 언뜻 드러난 발상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테세우스의 배는 처음부터 일종의 기계 장치 상태로 출발한다. 헌 부품을 새 부품으로 교체했다고 해서 배가 배 아닌 어떤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체 이후의 배가 과연 교체 이전의 ‘그 배’인가에 관한 것이지, 교체 과정에서 불가역적 변화가 일어나는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 비해 「시간 속의 너에게」의 서술자가 가진 고민의 초점은 보다 존재론적이다. 많은 SF에서 생체를 의체로 바꾸는 작업은 단순 부품 교체와는 아주 다른, 일종의 기술적 진화로 묘사된다. 진화는 일방적이고 불가역적이다. 그러한 진화를 겪고 난 뒤에도 이야기 속 서술자는 여전히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아가 전과 같은 종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가 스치듯 말한 ‘기억’이 과연 이런 질문들에 말끔한 해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단요의 『다이브』(창비, 2022)는 가공된 기억과 정체성 간의 관계를 흥미롭게 탐구한 소설이다. 주인공 선율은 물에 잠긴 2057년의 서울에서 기계 인간 수호를 건져온다. 수호의 정체는 죽은 인간의 대체품, 즉 복제인간이다. 딸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수호의 부모가 복제인간을 만들어서라도 슬픔을 극복하고자 했다는 설정인데, 여기에서 기억이라는 모티프가 유의미하게 삽입된다. 복제인간 수호는 생전의 수호가 가지고 있던 기억을 그대로 이식받았다. 만약 기억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유지하는 데 있어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이라면, 인간 수호와 복제인간 수호는 동일한 개체이다. 인간 수호의 죽음은 복제인간 수호의 삶으로 완벽하게 대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물론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간 수호와 복제인간 수호는 명백히 다른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쪽이 다른 쪽에 종속될 수 없으며 서로 우위를 가릴 수도 없다. 이식된 기억의 기만적 실체는 적절한 순간에 폭로되고, 복제인간 수호는 제 삶의 권리를 회복한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변주한 실험적 도식에서 동일성의 신화를 배격하는 이러한 시도는 현시점에서 윤리적 안정감과 타당성을 모두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가 취할 수 있는 해법의 극히 부분적인 사례일 뿐이다. 처음의 질문, 곧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동일성의 신화를 온몸으로 끌어안는 이야기들과도 마주해야 한다.
하신하의 단편 「지나3.0」(문학동네, 2024)의 주인공 지나는 성간비행 중인 우주선 안에서 자기 존재의 형식을 단계적, 불가역적으로 바꾸어 나간다. 주인공의 이름 뒤에 붙는 숫자는 그렇게 질적으로 변화된 존재의 버전을 표시한다. 1.0은 자연 상태의 인간, 2.0은 사이보그, 3.0은 프로그래밍된 의식이다. 「지나3.0」의 서사는 사이보그와 인간 개량, 마인드 업로딩 등의 발상을 주재료로 삼아 전개된다.
그렇게 나는 기계와 결합한 강한 몸을 가진 지나2.0이 되었다. 팔다리의 뼈는 티타늄, 인공 관절과 근육은 탄소나노튜브, 피부는 특수 실리콘으로 이루어졌다. 강한 내 몸은 우주선의 무중력 공간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근육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 두 시간씩 하던 운동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하신하, 「지나3.0」, 『우주의 속삭임』, 문학동네, 2024, 140쪽
이것은 SF가 인간 신체의 한계에 기반하여 특징적 발상을 전개해 나가는 매우 전형적인 방식이다. 지금까지 기술은 인간 신체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목적에 따라 발전을 거듭해왔으므로, 이러한 신체적 개량은 서사 내적으로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한 몸을 지키기 위해 갑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과 흡사한 방식으로, 작품 속 지나는 제 신체를 기계와 결합함으로써 한층 강화된 존재인 지나2.0으로 거듭난다.
이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지나2.0이 지나1.0과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지나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흥미롭게도 서술자는 자신의 모든 버전을 ‘나’라고 칭하는 것에 한치의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만 구별될 뿐, 의식 차원에서는 한순간도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기억은 「지나3.0」에서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지나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동력은 보다 깊고 모호한 지점으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마음일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고, 의식일 수도 있고, 자아일 수도 있고, 영혼일 수도 있다. 반면 지나의 몸은 결정적 변수로 간주되지 않는다. 지나의 정체성을 동일하게 유지하는 대가로, 이야기는 그의 몸과 의식을 이원화한 다음 몸의 비중을 알맞게 축소하는 한편 의식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서사 전략은 기계가 인간 신체의 약점을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오늘날 더욱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내 몸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나의 본질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몸에 맡겨진 임무가 아니다. 주인공의 신체에 일부 변형이 일어난다고 해도 본질이 훼손될 수 없는 것은 그의 의식이 여전히 정체성의 가장 고유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인간의 본질을 그의 내면으로부터 오롯이 끌어올리고자 하는 시도는 현실의 구체적 맥락과 관계 맺을 때 보다 견고한 의미를 획득한다. 다음은 김주영의 장편동화 『문시티』(풀빛미디어, 2023)의 한 대목이다.
동현이의 두 다리는 인공 신체라고 불리는 가짜 다리다. 뇌의 신호를 인공 신체로 보내 주는 뇌파 감응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서 진짜 다리처럼 움직이고 가짜인 티가 나지는 않는다. 가짜 다리의 인공 피부 색깔이나 느낌도 진짜 같았다. 만져 보면 체온과 똑같은 온도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동현이의 다리가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김주영, 『문시티』, 풀빛미디어, 2023, 13-14쪽
인간 신체의 변형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두고 보았을 때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특징적 발상은 「지나3.0」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동현이에게 중요한 것은 신체 기능 일반의 강화를 통한 인간종의 개량이 아니라, 개인의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대체된 신체 일부의 기능과 그 안에 담긴 사회적 맥락이다. 정재은의 단편 「내 여자친구의 다리」(창비, 2018)에서도 비슷한 발상을 엿볼 수 있다.
“그 다리로…… 발레…… 할 수 있을까요?”
연이가 다시 질문했다.
“그건 잘 모르겠구나.”
(……)
“아직은 인조 다리로 발레를 한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모른다는 것뿐이야. 난 너에게 맞는 인조 다리를 만들어 줄 수 있어. 발레를 하고 싶으면 네가 해야겠지.”
정재은, 「내 여자친구의 다리」, 『내 여자친구의 다리』, 창비, 2018, 37쪽
인용된 두 장면에 잘 드러난바, SF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신체적 변형은 장애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동현이와 연이가 인공 다리를 장착하게 된 이유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기계를 통해 장애를 보완 또는 무화(無化)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허구의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대체로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다만 SF는 이 익숙한 아이디어를 일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물의 삶으로 구체화함으로써 ‘인간다움’이라는 둔탁한 이미지에 균열을 일으킨다.
인간이 반드시 ‘누구’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이 시점에서 한 번 해체된다. 사이보그 담론은 인간과 기계 사이에 임의로 그어졌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예고한다. 사이보그는 어원적으로 기계와 인간의 결합체인 개조 인간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된 지나2.0은 사이보그의 어원적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문시티』와 「내 여자친구의 다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가. 사고로 잃은 다리를 인공 다리로 대체한 이들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호명되어야―또는 호명되지 말아야― 하는가.
우주의 혹독한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설계된 사이보그의 강인한 신체적 특징이 아이러니하게도 『문시티』와 「내 여자친구의 다리」 속 인물들에겐 약점으로 기능한다. 이들은 ‘다리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고, ‘로봇 다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격 미달’이란 비난에 시달린다. 몸과 의식의 어긋남을 겨냥한 이러한 차별은 애초에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설계한 의도에 명백히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을 사이보그로 규정하는 관점 역시 얼마간 유예되어야 할까. 아니면 그러한 임의적이고 폭력적인 경계 긋기에 저항하여 사이보그의 존재론을 새롭게 논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이제 인간은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 될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3. 마인드 업로딩과 존재의 해방
「지나3.0」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사이보그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지나는 제 의식을 신체로부터 분리해 서버에 업로드해야만 목적지로의 비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나1.0에서 지나2.0으로의 변화가 불가역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2.0에서 지나3.0으로의 변화 또한 불가역적이다. 이들은 분명 한 인간의 연속된 기억을 공유하지만, 각각의 존재는 이전 버전과 질적으로 아주 다르다.
“지나3.0……. 뉴런이 파괴되기 전에 나의 지식과 기억을 보존하려는 거군요.”
“그냥 보존이 아니라 영원한 보존이야. 또 너와 나의 뇌를 브레인넷으로 연결해 대화 없이도 서로의 지식과 감정까지 교환할 수 있고. 지나3.0에게 몸은 필요 없어. 지나3.0은 몸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거니까.”
하신하, 「지나3.0」, 『우주의 속삭임』, 문학동네, 2024, 143쪽
‘몸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이란 서술에 잘 드러난 대로 이 대목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쟁점은 의식과 신체의 ‘완전한 분리’에 있고, 이번에도 방점은 의식 쪽에 찍힌다.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한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몸은 그 중요도가 0에 수렴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마인드 업로딩은 사이보그 개념을 한없이 늘어뜨린 연장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인 인간의 몸은 일차적으로 개량되었다가 이후에 폐기된다. 「지나3.0」의 탁월함은 이처럼 사이보그와 마인드 업로딩이란 눈에 띄는 소재를 이야기 속에 단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불완전한 몸을 둘러싼 복수의 담론을 하나의 선형적인 이야기로 빚어냈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두 소재의 친연성뿐만 아니라 각각의 차별화된 특징과 개성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SF 장르의 소재와 발상이 독자들과 관계 맺으며 구축해 온 영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이보그는 일반적으로 현재 상태의 인간에 무언가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더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사이보그 개념이 지향하는 신체성의 핵심은 인간 신체의 기능을 증강하고 개량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마인드 업로딩이 지향하는 신체성의 핵심은 덜어내기 셈법에 따라 작동한다. 존재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인간의 신체 자체를 소멸되어야 할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사이보그와 마인드 업로딩은 기술적 진화라는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위치하게 된다. 이 맥락에서 마인드 업로딩은 사이보그 존재론으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어떤 무결함에 대한 욕구의 표출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궁극적 자유는 신체의 강화가 아니라 신체로부터의 이탈과 해방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어린이·청소년 독자에게 이것은 실현 불가능하고 자신과 무관한 일로 여겨질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상 자체가 마냥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기술적 진화가 가능해졌다는 가정 아래, 그것이 실제로 인간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해보는 것은 현시점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질문을 던져 보자. 신체 없이 의식만으로 제 존재를 입증하는 일은 가능한가. 그렇게 존재하는 의식을 인간종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몸과 의식의 불일치는 인간을 규정함에 있어 그야말로 사소한 요인이 될 것이다.
남유하의 「뇌 엄마」(사계절, 2021)는 이 문제에 관해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도식을 제공해준다.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유리관 속 뇌와 그 안의 의식으로서만 존재하는 어떤 엄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엄마는 8년 전, 내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어. (……) 엄마는 그 사고로 뼈와 장기들이 완전히 부서졌고, 온전한 건 머리밖에 없었지.
(……)
아빠는 거실 한가운데 실내 정원이 있던 자리에 엄마를 두기로 했어. 엄마가 기르던 올리브 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엄마의 뇌가 들어 있는 유리관을 놓아두었지.
남유하, 「뇌 엄마」, 『나무가 된 아이』, 사계절, 2021, 44-46쪽
「뇌 엄마」는 한 인간을 오랫동안 지탱해왔을 정체감의 물리적 토대를 소거한 다음 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몸에서 분리된 의식이 이전과 같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은 제 몸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이야기 속 엄마는 유리관 속 뇌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라 여기지 않는다. 되려 그 삶을 마감함으로써 존재의 마지막 의미를 실현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전개는 표면적 층위에서 몸과 의식을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존재를 규정하는 기존의 가치관을 고수하고자 하는 시도로 읽힌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엄마는 제 의지에 반해 신체를 박탈당한 인간이다. 그가 마인드 업로딩을 자의로 선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 소재에서 흔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모티프, 곧 신체로부터의 적극적 이탈과 해방에 관한 판단을 얼마간 유보하게 만든다.
마인드 업로딩이 이야기 속에서 자주 영생의 욕구와 결합한다는 사실도 짚어둘 필요가 있다. 발달한 기술에 힘입어 제 몸의 경계를 벗어나는 상상은 질병과 노화, 죽음과 같은 묵직한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유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종종 인간과 관련 없는 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뇌 엄마」의 결말이 갖는 의미는 사뭇 전위적으로 느껴진다. 마인드 업로딩에 관한 상상들에서 줄곧 구속, 속박과 같은 이미지로 연결되는 신체의 한계가 이 이야기에서는 ‘유리관 속의 뇌’로 가시화된다. 여기에서 뇌 엄마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를 제한하는 요소는 사고 이전의 신체가 아니라 유리관에 갇힌 뇌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조건에 묶여 영원히 사는 것은 개체의 자유를 심각히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므로, 이 이야기에서 존재의 해방은 엄마가 뇌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찾아오게 된다.
이것은 덜어내기 셈법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역설하는 마인드 업로딩의 놀라운 변주이다. 얼핏 인간 신체와 정체성에 관한 보수적인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듯 보이던 이야기는 결말부에서 더할 나위 없이 유연하고 낭만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을 ‘누구’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기존의 생각들은 이 지점에서 다시금 해체된다. 우리의 의식이 모종의 기술적 수단에 힘입어 신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전통적 기준과 관점에서 더 이상 인간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무언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래하지 않은 기술적 진화에 관한 갖은 담론에서, 우리 몸과 의식의 어긋남은 그렇게 필연이 된다.
4. 대답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무엇인가. 나는 인간이고, 동시에 여러 기계에 내 삶의 크고 작은 결정을 맡기는 사이보그이고, 온오프라인에 대중없이 흩뿌려진 모든 데이터의 주체다. 나는 획정된 경계선 안의 단일하고 안정된 개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내 몸과 의식은 시시각각 미묘하게 어긋난다. 미래에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조화로운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서 나는 몸과 의식의 어긋남이 인간을 규정함에 있어 극히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외려 우리 몸과 의식의 필연적 어긋남을 기반으로 인간 존재의 다양한 형식이 빠짐없이 제 존재론적 가치를 획득하는 세계를 꿈꾼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임의로 구분 짓는 무신경한 시도와 그로 인해 상처받는 이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생각들은 현실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시민의 조건을 나열하는 이들 속에서 나는 종종 노골적인 배제의 의도를 감지한다. 그럴 때마다 1인분의 정상성을 획득해야만 비로소 편입될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편협하고 비인간적인가를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들은 곧 시민의 조건을 넘어 인간 일반에 대한 SF적 사고 실험으로 뻗어나간다. 그 분주한 실험장에서 인간은 이미 수없이 진화를 거듭하였는데 어째서 현실은 아직도 이리 견고하기만 한지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미래의 기술적 진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경계를 부러 불확실하고 흐릿하게 만듦으로써 지금 바로 세계와 화합하는 용기일지 모른다. 그런 흐릿함 속에서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 인간성이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