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adow Dec 10. 2023

너 때문에 망친 내 휴가

팀장질 #2

"팀장질"이라고 나는 부르기로 했다.

팀장 역할에 심취해 사사건건 팀원의 업무에 간섭하고 지시를 하는 거다.

자기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며 오버하는 행동을 하는 거다.

 




11월의 어느 날 팀장은 휴가를 갔다. 연말에는 내년에 있을 팀 업무를 계획하느라 쉬기 힘들 테니 지금이 적기라는 이유다.


그러나 팀장은 휴가지에 도착해서도 수시로 팀원들과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듯했다.  업무사이트에 접속해서 뭔가 지시를 내리고 확인을 하는 절차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팀장의 괴롭힘이 시작된 이후 나는 웬만해서는 팀장과 개별적인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예외였다. 팀장의 지시사항을 사전 차단할 목적으로 웬만하면 혼자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팀장이 휴가를 떠난 다음날 밤.

퇴근 후 유유자적 하던 내게 갑자기 팀장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내가 하고 있는 일 중 우선순위가 아닌 일에 대해서 캐내듯 마구 물어댔다.

그가 휴가를 가기 전날인 이틀 전부터 시작이 된 것이고, 팀장이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아닌 일은 당장 2주 내에는 할 필요성이 없는 일이어서 그가 우선순위라고 꼽는 그 일은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팀장은 말한다.

"미치겠네..."


미치겠...네?

어이가 없어진 나는 되물었다.

"왜요?"


팀장은 그가 미치겠는 이유는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이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이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뜬금없이 그가 애정하는 두 팀원과 함께 당장 내일 화상회의를 잡으라고 했다.


너무 황당한 요구에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첫 번째는 그가 중요성을 제기한 사안에 대한 시급성.

담당자인 내가 판단하기에 우선순위 9위쯤에 있는 업무를 가지고, 그리고 정말 중요한 우선순위의 업무들은 그가 휴가지에 있어 팀장의 상사와 함께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일하고 있는 업무를 가지고, 그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에 있는 업무를 당장 급하게 해야 하는데 내가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쪼아댔다.


두 번째는 미치겠다면서 진행하자고 하는 화상회의와 이 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두 팀원의 참여 요청.

왜지? 그렇게 그들이 보고 싶나?


대화를 마치고 나서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화나게 만들었던 건 "미치겠네"라고 한 팀장이다.


그가 준비가 안 되겠어서 미치겠다는 그 업무는 그의 바람대로 우선순위 앞쪽으로 올 수는 없었다. 다른 우선순위들이 더 중요했다. 또한 그가 요청한 그가 애정하는 두 팀원을 포함한 화상회의도 진행하지 않았다. 그는 팀원들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겠지만 그 화상회의의 필요성이 없어 나와의 화상회의로만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화상회의 시 팀장은 그가 있는 휴가지가 네트워크가 좋지 않다며 화면을 끄고 진행하게 했다. 이럴 거면 전화 통화를 하자고 하던가.


이게 무슨 되지도 않는 감정 소모에 시간 소모인지...

나는 더 이상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안 되는 팀장의 폭주에 점점 팀장의 팀장질을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팀장은 다음 날에도 휴가를 냈다.

휴가지에서 병에 걸려 아프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팀장은 온라인상으로 계속해서 업무지시를 내렸다.



그러다가 내가 메일을 발송하는데 두 번의 실수를 했다.



첫 번째 실수는 본문은 제대로 썼지만 제목에 회신 날짜를 잘못 쓴 데서 비롯됐다.
회사 임원들에게 보내는 메일을 써달라고 해서 썼고, 팀장이 컨펌을 했다. 거기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CHO에게도 보낼 거냐고 물어보더니 , 내 이름을 빼고 본인을 담당자로 지정해서 발신하자고 했다. 그런데 제목에 회신 날짜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더니 화가 났나 보다. 사내 메신저로 

"네 이름 없다고 이렇게 메일을 아무렇게나 보내냐..."

"너무하네~" 라며 악담을 쏟아냈다. 


두 번째 실수는 수정해서 다시 메일을 보냈는데 이번엔 첨부파일을 없는 상태로 보내게 됐다.

그는 다시 악담을 퍼부었다.

"아오,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냐?"

하면서 "아오"를 채팅으로 연발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그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너 때문에 망친 휴가가 어떤 휴가인지 알긴 아는 거냐, 아오 내가... "


나는 너무 황당했다.

메일을 잘못 보내는 실수를 한 것은 맞으나...

그게 휴가까지 망칠 일인 것인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던 거지?

그래서 즉시 되물었다.

"그게 어떻게 저 때문에 망친 건가요?"


그는 말을 돌렸다.

그리고 이미 감정이 상해버릴 대로 상해버린 나는 그 말을 씹어버렸다.




나는 그다음 날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휴가지에서 "너 때문에 망친 휴가가 어떤 휴가인지 알긴 아는 거냐."는 말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휴가지에 와서 그와 나눈 대화들을 다시 살펴보며 내가 대체 무얼 잘못했는가에 대해 계속 곱씹게 되었다.


뭐 그렇다 치자. 팀장이 나 때문에 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휴가를 망쳤다고 치자.


그러나 나는 팀장 때문에 휴가를 망치고 있었다.

나는 연말까지 팀에 남아 차분히 내 일을 정리하고 팀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팀장이 보이는 이런 팀장질은 도가 넘을 대로 넘은 것 같다.

팀장은 뭣 때문에 이렇게 판단력이 흐려진 것일까.


휴가지에서도, 그리고 휴가에서 돌아와서도 신경 쓰느라 나 때문에 휴가까지 망쳤다는 '팀장만의 우선순위' 업무는 결국 진행하지 않게 되었다. 팀장이 이 건을 가지고 내가 휴가를 간 동안 사장님 보고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아마도 못 하게 될 거라는 것을.


나는 휴가 중간에 추진 중인 업무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매우 안타까운 척을 했지만, 마음이 아주 많이 홀가분해졌다.


너 때문에 망친 내 휴가. 사장님이 살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로벌 에티켓 없는 팀장과의 해외출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