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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adow Aug 02. 2020

근데, 왜 재입사하셨어요?

나는 왜 싫다고 나간 회사를 다시 다니고 있을까

"왜 다시 들어오셨어요?"

회사에 다시 돌아오고 나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처음에 재입사 제의가 왔을 때는 정중히 거절했다. 비록 불안정하긴 하나 한 벤처에서 나름 널럴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새벽까지 일하는 업무 패턴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근무 환경은 많이 좋아졌지만 말도 안 되는 제도를 적용하며 직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회사가 예전처럼 힘들지 않아. 이제 주 52시간 이상 근무하면 사장님 잡혀가."

"해외 콘퍼런스도 많이 가고, 영업이익도 많이 개선됐어."

"커리어 관리 좀 해야지, 이렇게 여기저기 다니다가는 큰일 나겠는데?"

"새롭게 적응하느니 원래 있던데 정착하는 게 낫지 않겠니?"

내 눈치를 살피며 달콤한 말만 늘어놓는 재입사 제안자 K와는 퇴사 이후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다. 그는 나를 재입사시켜야 승진에 도움이 됐다. 


K의 야욕과 상관없이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노력하지 않고 생긴 또 하나의 대기업 취직 기회였다.

하지만 이곳 벤처회사에 입사한 지 3주. 여기도 아는 사람이 불러서 편하게 들어왔다. 정중히 거절했다.


K는 또다시 나를 설득하러 회사 앞에 찾아왔다.

"입사 안 해도 좋으니까, 면접까지만 가 보자."


또 연락이 왔다.

"생각해 봤니?"


어느덧 나는 입사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입사 절차는 생각보다 길었다. K가 날 찾아온 것은 초봄이었는데 완전 더운 한 여름날 정장을 입고 최종 면접을 봤다. 나는 임원진들에게 그동안의 방황을 정리하고 싶다며, 막상 다른 곳 나가보니 우리 회사만큼 좋은 회사도 없었다며, 우리 회사의 향후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거기 기여하고 싶다며, 다시 들어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늘어놓고 있었다.


얼마 후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고, 연봉 제의가 왔다.


그런데! 현재 연봉에서 1500만 원이 깎인 제안... 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메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며칠 후, 500만 원을 올려 현재 연봉에서 1000만 원이 깎인 제안이 왔다.

하아... 이러려고 그 오랜 절차를 밟은 것인가?

기존 재직자들에게 물었다. 그 돈이면 오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곧 연봉을 10% 올려준다는 블라인드 캡처본도 받았다.


인사 담당자는 캠퍼스 리쿠르팅을 다니느라 너무 바빠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메일을 썼고 전화가 왔다.

"연봉이 전원 상향 조정된다던데 저는 왜 반영 안 해줘요?"

그는 연봉 상향 조정은 기존에 회사를 다녔던 사람들에 대한 보상 차원이며, 나 같은 경우 입사를 하면 평균적으로 올려주는 10%는 아니더라도 일부 보정해 줄 거라는 말을 했다. 또 지금의 벤처회사에서는 주지 않는 PI와 PS 지급액도 상당하니 올해 PI를 받으려면 빨리 들어와야 한다는 말도 했다.


길어진 절차에 쏟은 내 조그마한 노력에 대한 보상, 지금 재입사하지 않으면 이번 회사와는 영원히 안녕일 것 같은 불안, 다니고 있던 벤처 회사의 심각해지는 막장, 추후 입사 시 연봉 보정에 대한 기대 등이 겹치며, 나는 울며 겨자 먹기식, 혹은 못 이기는 척 1000만 원 깎인 연봉 제안을 수락하였고 몇 달 뒤 재입사했다.  


인사 담당자가 말했던 연봉 보정, 제시된 연봉 테이블에 적혀있던 PI/PS는 모두 거짓이었다.

연봉 보정은 사람마다 편차를 두고 다르게 적용하고 있어 점점 더 억울해졌다. 52시간 근무는커녕 나 혼자 셔터문 닫을 때까지 기존 인력의 구멍을 메우고 저녁, 주말, 휴일 없이 일만 했다. 신입사원들은 일을 덜 하는데 익숙했고, 기존 인력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다음 해 연봉 인상 때도 기존 직원들은 평가에 따라 연봉을 올려줬지만, 재입사한 나는 연봉 인상도, PI/PS도, 입사 전 제시한 연봉 테이블의 B기준이 아닌 C기준으로 무엇하나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쌓인 스토리를 모아 적정한 시기에 이의 제기도 했지만 인사팀장의 면박에 마음의 상처만 받았다.


이럴 걸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었다.

"회사 등쳐먹으려고 다시 들어왔는데, 다시 뼈꼴 빠지게 일하고 있네요"  

당시 '왜 재입사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그렇게 1년도 훌쩍 지났다.

여전히 짜증이 나고, 억울한 것은 점점 많아진다.


누군가가 또 묻는다.

"근데, 왜 재입사했어요?"

내가 왜 재입사를 했는지 이젠 나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처럼 주저리주저리 쌓아둔 불평 내지는 변명을 늘어놨다. 그러다 순간 스스로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완벽한 답을 찾게 됐다.


"내 커리어를 완성하려고요"

이미 알고 있었던 건데, K의 조언이기도 했는데, 면접 때도 내가 자발적으로 이야기했던 건데, 그간 쌓인 불만으로 인해 나는 계속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내가 1년 이상 다닌 유일한 회사는 이 회사다. 퇴사 이후에도 유수의 회사를 다니며 다양한 경력을 쌓긴 했지만 1년 이상 자리잡지 못했다. 젊었던 당시의 난 이것이 그 어디든 가서라도 어떤 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지만, 패턴이 반복되며 불안한 마음도 커졌다. 회사도 짧지만 다양한 나의 경력을 매우 잘 활용하고 있음에도 경력으로는 하나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입사 후배들보다 연차도, 연봉도 낮다.


너무 정신없게 만드는 회사 업무 특성 때문에 나는 또다시 이 회사에서 1년을 넘게 버티며 커리어를 쌓고 있다. 이리저리 옮겨다닌 끝에 다시 갖게 된 이 회사 경력 한 줄은 어쨌건 적어도 나의 업무 능력을 증명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조금을 참지 못하고 퇴사를 꿈꾼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지금 나가면 이제 이 회사랑은 영원히 안녕이야.

나는 내 커리어를 완성 중이야.

이제 어디 가도 쉽게 취업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한결같이 회사를 다녔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위안한다.

그래도 밖에 나가서 이들이 겪을 수 없었던 다양하고 재밌는 경험을 해 봤다고. 그것이면 됐다고.

 

그리고 내심 결심한다.

이제는 외부에서 함부로 쌓을 수 없는 경험을 내부에서 쌓아보자고.

놀면서 월급 받는 기쁨도 한 번 누려보자고.

매거진의 이전글 정말 안 어울리는 전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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