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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adow Aug 28. 2020

너와 나를 표현하는 알파벳은 무엇?

어디에나 존재하는 특별한 회사원들 #2

다시 세대 정의가 유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요즘 세대를 두고 Z세대라고 부른다. 90년대 생을 이해한다며 책도 읽고 강연도 듣는다. 리버스 멘토링도 유행이다. 


87년 생 혜리는 무슨 세대인가? 

X세대도, Y세대도, Z세대도 아닌 것 같은데. 

나와는 다른 부류인 것 같은데. 나는 무슨 세대고, 혜리는 무슨 세대지?




2011년. 우리 사업부 최연소 입사자 87년생 혜가 들어왔다. 혜는 해외대 석사 출신으로 조기졸업을 했다. 원래 있던 막내보다 3살이나 어린 신입의 등장에 사업부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했다. 당시 석사 이상 출신만 채용하던 사업부에서 혜의 기록은 영재 코스를 밟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막내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깰 수 없는 기록이었다.   

 

같은 프로젝트를 하게 되어 내 옆자리에 앉은 혜는 참으로 해맑았다. 미국 면접 당시, 회사의 TV광고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는데, 그것 때문에 뽑힌 것 같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가끔은 회사에 혜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회사에 찾아온 어머니와 밥을 먹고 온 혜의 손에는 늘  10인분 정도의 음료나 커피가 들려있었다. 혜는 해맑게 웃으며 "엄마가 잘 부탁드린대요"하고 커피를 건넸다.


평소 우유 외에는 뭘 먹지 않은 것 같은데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생기발랄한 모습에 역시 젊음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회식이나 행사 때 장기자랑에서도 댄스를 마다하지 않는 적극적인 모습에 외국물이 좋긴 좋구나 싶었다.


중학교 때 뉴질랜드로 가서 조기유학을 시작한 혜는 영어를 참 잘했다. 당시의 프로젝트가 해외 프로젝트여서 혜리가 업무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다. 대신 혜영어 외의 업무가 주어지면 "아, 제가 한국말을 잘 못해서요"라는 말로 선배들을 혼란스럽게 헸다. 유창한 한국어로 된 한국어를 잘 못한다는 핑계에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하는 막내 혜택이 적용됐다.




해외 프로젝트가 끝나고 혜는 조 차장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에 갔다. 몇 달 뒤, 나도 조 차장의 SOS로 3일 동안 업무 지원을 하러 가게 됐다. 근데 조 차장이 내게 시키는 일이 참 이상했다. 곧 외국인 손님이 오는데, 혜가 외국인 손님에게 영어로 설명을 해야 하니, 나더러 혜를 위한 영문 스크립트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혜가 한국말을 잘 못해 업무 파악이 안 되므로, 영문 스크립트를 혼자 작성할 수 없단다. 조 차장이 준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도 혜처럼 "아,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요."라는 핑계를 대고 이 일을 안 하고 싶었다.


영어 스크립트를 작성하며 주변 상황을 둘러보니 눈꼴이 시렸다. 혜는 조 차장에게 비싼 점심과 차, 비싼 저녁을 얻어먹는 것이 당연한 듯 보였고, 업무시간에는 업무를 하지 않고 개인 공부를 했다. 조 차장도 이상했지만 조 차장의 울타리 안에서 공주와 같은 생활을 즐기고 있는 듯한 혜의 모습도 참으로 이상했다.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사내 개인 게시판에 조 차장과 혜리는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 메시지를 매일같이 주고받았다. 혜리의 어머니와 조 차장은 전화번호까지 교환하고 통화를 자주 하는 듯했다. 어제도 통화했단다. 평소 조 차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으로서 혜리에게 조 차장의 업무 스타일이나 평소 행동이 납득이 되느냐고 물었다. 혜리는 들은 바와는 달리 본인 생각에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3일 동안 있던 그 건물이 혜를 위해 조 차장이 지어놓은 성처럼 보였다. 나는 혜리 공주를 위해 차장이 대령한 시녀가 된 기분이었다.




1년이 지났다.

혜리와 조 차장의 업무적 협력 관계(?)가 파탄을 맞은 것 같았다. 개인 게시판에 있던 애정 어린 글들은 어느 순간 모두 삭제되어 있었다. 혜는 조 차장의 프로젝트를 나와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방황하고 있었다. 방황이라기보다는 가는 프로젝트마다 쫓겨났다는 것이 맞을 수 있다. 조 차장의 공주 대우가 혜를 이젠 시종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짜 공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혜리는 다시 내게 왔다. 팀장은 혜 다독이며 일해보라고 했다. 혜는 이후 들어온 신입보다도 훨씬 더 일을 못했다. 처음 보았을 때 품고 있던 열정마저 잃었다. 뭐만 이야기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억울하다고 했고, 파워포인트의 선 하나도 제대로 그릴 수 없는 요즘 말로 진정 '월급루팡'이 되어 있었다.  


혜리는 결국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래도 혜의 미래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딸을 조기유학 보낼 수 있는 돈 많은 아버지와 딸의 직장 상사에게 지극정성인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조 차장은 혜가 나가고 곧 성희롱 이슈가 제기되어 회사에서 잘렸다. 혜부모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이내 곧 혜의 소식이 들려왔다. 아나운서를 준비한다고 했다. 한국말을 못 한다더니, 웬 아나운서인가? 공정해야 할 방송국이 그녀를 채용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TV에서 혜를 볼 일은 없었다.


또다시 혜의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회사엔 혜가 입사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혜 또래의 신입사원이 제법 많이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게시판에는 이런 제목의 글이 떴다.

"87년생 다루는 법"


는 2010년대를 살아가는 기성세대들이 이해하고 존중했어야 할 신세대 부류였나 보다.




혜리와는 다른 부류인 87년생들이 이 글에 분개하지 않길 바라며,  글을 맺기 전 마지막으로 뜬금없는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XYZ 다음은 A세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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