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11)_[걷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 딱 일주일만이라도.’
2020년 말, 이틀 걸러 하루씩 밤을 새워 일 하면서 여러 번 소망하고 갈망하고 다짐했다. 2021년 1월이 되면 난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딱 일주일만이라도.
그리고 아무 일까지는 아니지만, 정말 별 일 없는 1월을 맞았다.
‘선생님이 제일 바쁘시니 선생님 일정에 맞출 게요.’ 회의 일정이라도 잡을라 치면 ‘저 별일 없어요. 아무 때나 잡으셔도 됩니다.’ 하고 씩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주일. 정확히 말하면 별 일정 없고 특별히 해내야 할 일 없는 일주일. 소망하고 갈망하며 다짐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한 첫날. 느지막이 일어났다.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고 레몬차를 타서 소파에 앉았다. ‘뭘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는데 앉자마자 ‘뭘 할까?’라니.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보는데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정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나?’ SNS를 열었다. 다들 뭔가 이루고 있는 사람들. 누구는 사무실을 새로 계약하고, 누구는 올해 강의 계획을 올리기도 하고, 누구는 열심히 자기 작업을 올린다.
불안하다. 이러다 정말 아무 일도 안 하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된다. 이틀, 사흘, 나흘. 정말 별 일 없이 시간이 지났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책도 눈에 안 들어온다. 읽던 줄을 읽고 또 읽고 있다. 시간이 나면 열심히 읽겠다고 쌓아뒀던 책들인데, 며칠이 지나도 한 권을 읽어내지 못했다. TV를 켜 놔도 멍하니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심지어 없던 불면증까지 생겼다.
걷고 있어요 (글 그림 미야니시 타츠야, 번역 이정연, 아이노리) 이 그림책에는 그냥 걷는 동물들이 나온다. 개미들은 달콤한 것을 찾아 걷고, 악어도 다리는 짧지만 걷고 있다. 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옆으로 걷고, 살금살금 바퀴벌레도 걷는다. 그리고 마지막. 씽긋 웃는 아이 하나가 나온다. ‘나도 힘을 내서 걷고 있어요.’ 하고 말하면서 걷. 는. 다.
그랬구나. 나는 걷는 법을 잊어버렸구나. 늘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다니기만 해서 이제는 뛰지 않으면 불안하구나.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 탓에 중간중간 쉬는 법도, 편안히 숨을 고르는 방법도 모르는구나. 개미처럼 바퀴벌레처럼 지네처럼 문어처럼 꾸준히 걷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주저앉아 버린 것. 앉아 쉬지 못하고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걷는 사람들을 보고 얼른 다시 뛰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계속 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을 뿐.
뜨거운 사막을 오가는 낙타는 느리게 걷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유목민이 낙타에 소젖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데 너무 느린 낙타 때문에 우유가 뜨거운 햇빛을 받아 굳어 버터가 탄생했다는 유래가 있다니 말 다 했다. 하지만 낙타는 그렇게 오래 걷는다. 말과 장거리 경주를 하면 말이 이기지만, 그다음 날 말은 죽고 낙타는 멀쩡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렇게 걷는다는 건 어떤 걸까?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걷다 보면 어떤 것들이 보일까? 잠깐 멈춰 서서 길가에 핀 꽃도 들여다보고, 조개껍데기도 하나 주울 수 있겠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눈가 주름도 보고, 아파 우는 이 손도 잡아줄 수 있겠지?
멍하니 일주일을 보내고 나는 살짝 일어났다. 날씨는 추웠지만 걸어보았다. 아직은 빨리 걷고 집으로 돌아가 컴퓨터를 켜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휴대전화를 열어 내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이제부턴 뛰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뛰다 쓰러지는 대신 꾸준히 걷기로 한다. 하루하루 꾸준히 걷다 보면 주변을 살피는 근육도 생기고, 차분히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도 생기겠지. 뛰지 않고 걷는 삶에도 익숙해지겠지.
사뿐사뿐 걷고 있어요
나도 힘을 내서 걷고 있어요.
그림책 마지막 웃으며 걷는 아이처럼, 다음엔 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