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14)_『줄줄이 꿴 호랑이』(권문희, 사계절)
도서관에서 좀 이상한 프로젝트를 한 일이 있다. ‘빈둥거리거나 책 읽거나’ 아이들이 20분 동안 빈둥거리거나 책을 읽으면 도장을 하나씩 찍어주는 프로젝트였다. 도장 50개를 모으면 문구상품권(문화상품권 아니고 동네 작은 문구점과 도서관이 협약해서 만든)과 바꿔주는 거였다.
“빈둥거리는 게 뭐예요?” 거의 모든 아이들이 물었다.
“응, 그건 말이지.” 우리는 『줄줄이 꿴 호랑이』(권문희, 사계절)를 읽어줬다.
옛날에 게으른 아이가 있었어.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하루는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어. "너는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만 싸고 있냐?" 게으른 아이가 대답했어. "괭이가 있어야 땅을 파지요." 다음 날, 어머니는 괭이를 얻어다 주었어.
“이 책에 나오는 아이처럼 방안을 뒹굴뒹굴 굴러다니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걸 말해.”
“그럼, 빈둥거릴래요!”
아이들은 책을 읽는 대신 빈둥거리고 도장을 받기로 하고 도서관 바닥에 누워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빨리 굴러다니기만 하는 게 아니고, 친구와 얘기하면서 굴러다니는 게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 “어떤 생각이요?” “어떤 생각이어도 괜찮아.”
호기롭게 빈둥거리고 도장을 모으려던 아이들은 대부분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아, 못하겠어요. 그냥 차라리 책 읽을래요.”
책을 읽겠다는 게 반가운 소리이긴 했지만, 어쩐지 씁쓸했다.
‘줄줄이 꿴 호랑이’에 나오는 아이는 어머니가 가져다 준 괭이로 땅을 파고 온 동네 똥을 모은다. 그리고 거기 참깨를 뿌리니 엄청난 참깨 나무가 자라고 그걸로 기름을 짠 아이는 강아지 한 마리를 기름에 절여 밧줄을 길게 꿰어 묶어놓는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은 호랑이들이 강아지를 꿀꺽 삼키지만, 기름에 절여 미끌미끌해진 강아지는 호랑이 똥구멍으로 쏙 빠져나오고 그 다음 호랑이가 또 꿀꺽 삼키지만 또 똥구멍으로 쏙 빠져나오고. 결국 줄줄이 꿰어진 호랑이를 팔아 아이와 엄마, 그리고 강아지는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나 뭐라나.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이 대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말은 ‘일’이다. ‘일’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다른 걸 했다. 바로 ‘상상하기.’ 머릿속으로 참깨도 심어보고 호랑이도 꿰어보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으리라. 그런 시간을 충분히 지내고야 어머니가 주는 괭이 한 자루로 그 큰 ‘일’을 해낼 수 있었겠지.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그럴 시간이 없다. 할 ‘일’이 너무 많다. 배워야 할 것은 점점 더 늘어난다. 이제는 영어, 수학 뿐 아니라 코딩도 배워야 한다. 컴퓨터 언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배운 지식정보를 다 써먹지도 못하고 세상은 또 바뀔 가능성이 많다는 거다. 주산 부기 타자 자격증을 모조리 딴 우리 언니가 대학을 졸업할 땐 컴퓨터가 나왔고, 열심히 영어를 가르치면 뭐라도 될 거라 믿었던 우리 세대는 저절로 번역을 해주는 스마트폰 어플에 놀라고 말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먼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배우는 것들이 과연 그때도 쓸모 있을까? 아니, 그 직업이 남아있을까?
빈둥거리기. 뒹굴거리며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일’이 아니라 ‘시간’이다. 아이들이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싸고,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 쌀 시간.’ 충분히 빈둥거린 아이들은 말할 것이다. “괭이 한 자루 주세요.”
그 시간을 견뎌내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 몫이다. 같이 빈둥거리면 참 좋겠지만, 아마 쉽진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