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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숙 Feb 17. 2022

나는 배웁니다

그림책으로 본 세상 (20)_『나는 [    ] 배웁니다』

“아 그러니까 뭘 눌러야 인쇄가 되는 거야?”

“메일을 받았는데, 그걸 종이로 뽑으려면 어떻게 하는 거야?”

“뭘 눌러야 저장이 되는 거라고?”     


한 달 전쯤인가? 어떤 어르신 한 분이 도서관 사서 선생님을 붙잡고 컴퓨터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포탈 서비스에 가입해서 메일을 받는 법, 한글 문서를 작성하는 법, 메일을 고쳐서 다시 보내는 법. 누가 봐도 아주 기본적인 것을 모르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드리던 사서 선생님도 이틀에 한 번 꼴로 오셔서 묻는 바람에 살짝 난감하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나섰다. 도서관에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이용자에게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주말 근무가 있던 어느 날, 또 뭔가 배우러 온 어르신께 큰소리로 말씀드렸다. “제가 알려드릴게요!” 어르신은 메일 두 개를 합치는 방법을 알려 달라 했다. 그건 어렵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니, 이번엔 엑셀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아, 엑셀이요?”

“사실은 내가 웬만한 기계나 설비 관련된 자격증은 다 가지고 있거든. 근데 컴퓨터는 할 줄 몰라. 컴퓨터를 조금 배우고 엑셀을 조금 할 줄 알면, 누가 취직을 시켜준다는 거야. 그래서 열심히 배워보려고. 그런데, 나한테 맞춰서 가르쳐줄 학원 같은 것도 없고, 빨리 배워야 해서...”

하지만, 몇 시간 만에 엑셀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엑셀기초’에 대한 책을 빌려드리고 이 책을 보고 독학을 해보시고, 안 되면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책을 빌려 돌아가는 어르신 뒷모습을 보면서, ‘컴퓨터도 잘 못 다루는 분이 독학으로 엑셀을 한다고? 취직은 어렵겠는데. 나는 뭐 최선을 다했으니까.’ 생각했다. 

     

그 어르신을 잊을 즈음. 엊그제. 오래간만에 주말 근무를 하는데 또 그 어르신을 만났다. 복사기를 쓰러 오신 거였다. 나를 보더니 너무 반가운 얼굴로 “선생님이 가르쳐준 덕분에 나 취직되었어! 그런데 복사기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겠더라구.” 하는 게 아닌가. 

놀랐다. 밤새 끙끙대며 기본 엑셀을 익혔다 했다. 어느 관리소에서 기계와 설비를 담당하는 일을 하게 되셨다고 하셨다. 어르신이 컴퓨터를 익히기 위해 도서관을 드나드신 지 한 달 남짓 안에 일어난 일이다. 

“복사기가 있기는 한데.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아. 도서관 선생님들은 그냥 해주는 게 아니라,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거든. 그래서 자꾸 오게 되네.” 

도서관 복사기와 사무실 복사기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기본 적으로는 원리가 같다고 이것저것 알려드리고 나니 또 이런저런 질문을 해오셨다. 어느 틈에 디지털 자료실에 컴퓨터 예약을 하는 방법을 익히셨는지 나를 자기 자리로 데리고 가더니 폴더 만드는 법, 문서를 합치는 법. 이런저런 질문을 해오셨다. 하나하나 설명드리고 순서도를 만들어 드렸다. 주변이 워낙 조용해서 조금 신경 쓰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르신의 목소리 크기와 속도, 그리고 분위기를 맞춰드리고 싶었다.    

  

부끄러웠다. ‘평생학습이 어쩌고 저쩌고.’ ‘공공도서관의 역할은 어쩌고 저쩌고.’ 마이크 잡고 떠들고 어느 연구 자료에 써대는 건 잘했는데, 정작 현장에서 ‘배우려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배울 수 있는 사람’과 ‘배울 수 없는 사람’을 가르고 시작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차피 안 될 거니 그냥 가만히 있지.’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   ] 배웁니다』 (가브리엘레 레바글리아티 글. 와타나베 미치오 그림. 박나리 옮김. 책속물고기) 이 책에는 다양한 것을 배우는 사람이 나온다. 젓가락질을 배우고, 꽃을 심는 방법을 배우고, 수영을 배우고,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아침에 일어나 TV로 들리는 외국어를 익히기 위해 애쓰고, 뜨개질을 배우고, 오케스트라에서 심벌즈를 배운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날이다. 생일이기 때문이다. 웃으며 케이크 촛불을 끄는 사진에 담긴 자신을 보며 조용히 말한다. “일흔네 살은 전혀 늙은 게 아니야.” 

맞다. 나는 배웠다.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걸. 배운다는 건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서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런데, 사진이나 자격증 같은 걸 종이에 나오게 하는 거 있잖아?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어르신이 또 물어왔다. 

“아, 스캔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렇게 들은 거 같아. 스캔인가 뭔가.” 

“그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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