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시작하며
거짓말처럼 갑자기 번역일이 끊겼다
지난 몇 년간은 쉬지 않고 번역 일을 해서 참 좋았다.
책 한 권의 번역을 끝낼 때마다 고맙게도 또 다른 번역 의뢰가 들어와 연달아 일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두 가지 번역 일이 동시에 들어왔다. 잘나가는 번역가라도 된 것 마냥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분량이 많아서 힘들어 죽겠지 뭐야’, ‘오늘도 밤을 새워야겠어' 하며 남편에게 불만인 듯 불만 아닌 불만 같은 자랑도 했다. 1년에 한두 권 겨우 번역을 할까 말까 했던 과거의 내가 그토록 꿈꾸던 미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번역을 너무 열심히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밤마다 어깨가 뭉치고 아팠다. 그래도 직업병이려니 생각하며 하루하루 즐겁게 번역했다. 딱 한 달만 번역 일이 없어 빈둥빈둥 놀면 좋겠다는 배부른 생각도 더러 하면서.
더위가 한창이던 8월. 몸도 마음도 조금 지쳤을 무렵, 때마침 다음 번역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다. 야호! 당분간 번역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길 바라면서 한 달가량 아주 신나게, 아니 한없이 게으르게 늘어져 지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뒤에도 번역 의뢰 메일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이나 실컷 읽자고 생각했다. 키보드를 치고 싶어 근질거리는 손으로 전자책 책장을 톡톡 넘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래간만에 가족과 여행도 다녀왔다.
석 달째,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뚝 끊길 수도 있나? 혹시 번역 회사에서 내 메일 주소를 잊은 건가? 아니면 시리즈로 내게 번역을 맡기던 출판사가 설마 망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영영 번역을 못 하게 될까 봐 초조했다. 이제 겨우 어디 가서 번역가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말하기엔 아직 그 명함에 잉크도 다 안 말랐다. 진짜 명함이라도 만들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겠네. 아니면 지금이라도 명함을 파서 여기저기 돌릴까?
뭐라도 해야겠어
부랴부랴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백수 모드에서 다시 번역가 모드로 돌아와 번역에 도움이 되었던 책들을 복습하듯 읽었고, 바쁘게 일하는 동안 놓쳤던 번역 관련 정보나 신조어도 찾아보며 언제든 다시 번역 작업실로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렇지만 불안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석 달밖에 안 지났으니 여유를 좀 가져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시간은 프리랜서를 초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러다가도 당장 내일 새로운 번역 의뢰가 올 수 있다. 그럼 얼씨구나 반가워서 버선발, 아니 발목 양말 신은 발로 달려 나가 일을 덥석 받아오겠지.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까 당장 뭐라도 시작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했던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읽고 쓰는 것밖에 없는, 못난 나란 존재. 번역 작업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뭐라도 써 보려고 조용히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 남 이야기는 많이 옮겼으니까 이참에 내 이야기를 좀 써 보자. ‘번역가’로서의 내 이야기를! 남들에게는 어쩌면 부업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내 경험들이 대부분 짠 내 나고 가볍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세상에 실력 좋고 이름난 번역가들의 ‘쿨내’ 나고 진지한 번역 이야기는 많으니까 이런 이야기가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