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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Dec 09. 2022

달라진 번역 계약서



얼마 전 다시 시작한 번역 일.

하던 대로라면 일 시작하자마자 번역 에이전시에서 보내온 계약서 2부에 각각 도장을 찍어, 하나는 내가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등기로 에이전시에 다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이번에는 담당자가 메일로 보내온 전자 계약서에 전자 서명을 했다. 언제부터 종이 계약서가 전자 계약서로 바뀐 거지?? 내가 번역을 너무 오래 쉬었나?? ;;;


하긴 전자책 출간을 할 때도 담당자 얼굴 한 번 못 보고 전자 계약을 했는데(세상 간편하긴 합디다, 정이 없어 그렇죠) 번역 계약이라고 이런 방식으로 안 바뀔 이유는 없지. 이러다 조만간 계약뿐만 아니라 번역까지 전자 번역으로 다 해버리겠다며 나 같은 번역가들을 저버릴까 봐 겁나지만 ㅎㅎ 뭐 어쩌겠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아무튼 방구석 번역가가 우체국 나들이할 이유가 영영 없어졌구먼.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의 번역 계약서를 차곡차곡 모아둔 파일철이 통통하게 살이 찔 일도 없어진 건가??

이제는 누렇게 바랜 2001년 12월 26일 자 내 첫 번역 계약서부터 지금까지의 계약서를 순서대로 빠짐없이 모아둔 파일이 내게 하나 있다. 그때 일부러 두툼한 파일철을 사서 그걸 계약서로 다 채울 때까지는 번역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며 각오를 다지곤 했는데...


흠, 이대로 멈출 순 없지. 계약서 출력해서 파일은 계속 채워나가야겠다. 끝까지! n


냉혹한 승부사 알파고는 인간에게 천년이 걸릴 대국을 스스로 학습한 뒤 오직 이기기 위한 바둑을 두었다. 그러나 냉혹한 승부사이기는커녕 원작에 대한 사랑과 집착으로 늘 질척대는 인간 번역가는 앞으로도 울고 웃으며 이 눈물과 웃음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비효율적으로 고민할 것이다. 그들은 그 고민이 주는 고통과 희열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곧 사라질 거라 했던 종이책과 동네 서점들이 여전히 건재하듯이, 인간의 번역도 자리를 지킬 것이다.

- <번역하다 vol.10> 커버스토리 '번역, 그 만만한 위상에 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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