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모 번역가와의 대화

by 눈큰


부끄러운 지난날


마감일에 맞춰 제출한 내 원고는 대부분 출판사로 넘겨지기 전에 번역 에이전시 편집자의 교정을 거친다. 편집자는 원고 전체가 아닌 초반 10~20퍼센트 분량을 검토하면서 수정해야 할 부분과 앞으로의 교정 방향을 붉은색 글자로 표시한 후, ‘나머지도 위의 편집 내용을 토대로 수정 바랍니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번역가에게 돌려보낸다. 그러면 번역가는 편집자의 교정 방향을 참고로 원고 전체를 최종적으로 한 번 더 다듬어 제출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내가 책을 열 권 정도 번역했을 무렵에 최종 교정을 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도 나는 편집자로부터 돌려받은 교정지를 수정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교정지가 편집자의 날 선 지적들로 울긋불긋했던 모양이다. ‘나름 열심히 했는데 붉은색이 왜 이리 많아?’ 하면서 밤늦게까지 원고를 수정하던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맞춤법이 틀린 건 엄연히 내 실수니까 할 말이 없지만,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문장까지 ‘어색하다’, ‘문맥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딴지를 건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원문을 전혀 모르는 편집자로서는 당연한 지적들이었다) 결국 나는 하던 일을 잠시 내팽개치고 블로그 이웃이자 평소 흠모했던 한 베테랑 번역가의 블로그를 찾아가 안부 게시판에 비밀글로 넋두리를 했다.


'밤늦은 시각에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XXX 님

번역 작업을 하다가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요즘 제가 지난 한 달 동안 번역한 책의 교정을 보고 있는데요.

편집자분이 너무 제 원고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서 정말 진이 다 빠진답니다.

맨주먹으로 기냥 쥐어 터지는 기분이에요.

저도 XXX 님처럼 대리 번역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제 이름이 역자로 실린 책이 열 권이 넘었는데, 이렇게 구박을 받다 보면 번역에 대한 자신감이 뚝뚝 떨어집니다.

XXX 님은 그런 적이 있으셨나요?

혹시 있으셨다면 어떻게 하셨나요?

어디 가서 하소연하면 실력 없다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아서 여기 끄적이고 갑니다.

연일 무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길…'


그러자 고맙게도 그분이 그 밤에 곧바로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셨다.


‘하소연하셔도 괜찮아요. ㅋ 홀아비 사정 과부가 안다고…

동업자한테 안 하면 누구한테 해요. ㅎㅎ

그렇지만 뭐… 번역한 책 150권 다 돼 가는 저도 교정지 빨갛습니다.

그 구박, 좋은 거예요. 다 공부가 되잖아요. 구박을 많이 받을수록 다음 작품에서 더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열 권쯤 했을 때 저는 아마 더했을 거예요. 엉망진창…;;;

사람이니 당연히 지적받으면 기분 나쁘죠. 저도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다운되어 있었어요. 그렇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게 다 고마운 일들. 그렇게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는 어디가 잘못됐는지 모르거든요. 한 3년 전에 번역 문장을 선배한테 질문했더니, 그 경력에 아직도 어떻게 이런 잘못된 번역이 있냐고, 초장에 잘못 배웠다고 야단을. ;;;;;

지적해주는 분께 고마워하세요. 그리고 빈말이어도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그 순간, 쓰나미처럼 창피함이 밀려왔다. 나는 곧바로 대댓글을 달았다.

“댓글 정말 고맙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그러자 대댓글에 또 댓글이 달렸다.


‘부끄러운 일 아니에요. ^^ 발전해나가는 단계.

내 경력에 내 나이에 지적받으면 정말 쪽팔려요. ㅎㅎ

열 권 많이 한 거 같죠? 초보 단계예요. 어떤 욕이든 많이 먹고 많이 자라야 할 시기.

힘내세요, 파이팅! (이라고 말하는 내 책상에는 초짜 편집자가 고쳐놓은 심란한 교정지가… ;;)’


오래전 일인데도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때 내 시건방은 왜 그리 하늘을 찔렀을까?

그런데도 나처럼 철없는 번역가에게 자신의 교정지도 빨갛다며 상처받지 않게 위로하고 충고해주었던 그 번역가 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고 고마울 따름이다.



번역에도 오답노트가 필요해요


그날부터였다. 나는 그동안 번역했던 원고들에서 편집자가 빨갛게 교정을 봐둔 문장들을 빠짐없이 모아 이른바 ‘번역 오답 노트’ 파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 번역할 원서를 받기 전이나 번역 일이 없어 한가할 때면 종종 그 오답 노트를 읽고 또 읽었다. 나도 모르게 저질렀던 맞춤법 실수들과 습관처럼 썼던 어색한 번역 투 문장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것이다.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그러다 언젠가 한 번은 에이전시 편집자가 내 최종본을 검토하더니 더 이상 교정도 하지 않고 곧바로 출판사에 넘긴 적이 있었다. 내 원고가 깔끔해서 따로 교정을 보지 않았다는 메모와 함께.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살면서 들은 칭찬 중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다.



그래서 실력이 나아진 걸까


물론 그 후로도 에이전시 편집자의 공짜 교정 수업은 계속되고 있다. 까다로운 책이거나 꼼꼼한 편집자라도 만나면 정말 새빨간 교정지를 받기도 한다. 그래도 교정지가 붉다고 속상해하지는 않는다. 배울 게 많아서 오히려 좋다. 반면에 교정 과정 없이 출판사에 그대로 최종 원고를 보내는 경우도 많아졌으니 실력이 나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날 믿고 번역을 맡기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스승 같은 편집자에게는 늘 고맙다. 내 눈에는 별문제 없어 보였던 원고에서 매번 잘못되었거나 어색한 부분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편집자의 능력에 감탄할 때가 많다. 역시 편집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하다. 아무쪼록 오답 노트가 필요 없어지는 그 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