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번역가의 하루

by 눈큰
출퇴근 시간 10초


내가 번역 작업실이라고 부르는 곳은 화장대 옆으로 기다란 철제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우리 집 안방이다.

아침 일찍 남편이 허겁지겁 출근하고 아이들까지 우당탕퉁탕 등교를 하고 나면 나도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 준비라는 것도 사실 별거 없다. 집안 전체를 가볍게 한 바퀴 정리하고, 내 외모도 살짝 점검(?)한 뒤, 진한 믹스커피를 한잔 타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 (우아한 별다방 출근 따윈 없음)


마감이 코앞인데 혹여 해야 할 분량이 밀려 있으면 그나마 그런 출근 준비도 없다. 집안일은 고스란히 내팽개치고 곧바로 안방으로 직행이다. 떡진 머리에 잠옷 겸 실내복 겸 출근복인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태풍이 와도 그 모습 그대로 작업실에 골인할 수 있다.



업무 스케줄요?


작업실에 들어오면 맥북부터 연다. 책상 위에는 방금 들고 온 커피잔 하나와 맥북밖에 없다. 예전에는 원서가 도망가지 못하게 꽉 붙잡아두는 나무 독서대도 있었는데, 요즘은 대부분 pdf 파일로 원서를 받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물건은 거의 필요 없어졌다. 맥북을 쓴 이후로는 마우스도 쓰지 않는다. 화장지며 연필꽂이 등 잡다한 물건들은 화장대 위에 다 있다.

맥북을 열면 메일, 카페, 브런치나 블로그 등 인터넷 동네를 산책하듯 한 바퀴 돈다. 옆길로 너무 길게 새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면서 말이다. 그런 다음엔 그날 정해진 번역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점심시간까지 쭉.

점심시간은 대중이 없다. 대개는 배꼽시계가 울리면 그때가 바로 점심시간이다. 그날따라 번역이 죽어도 안 풀리거나 반대로 너무 잘 풀리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일하다가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부랴부랴 늦은 점심을 먹기도 한다.

‘혼밥’을 하면서 종종 TV나 OTT 서비스를 짧게 보는데, 혹여라도 재미있는 볼거리를 발견하면 작업실로 돌아가는 시간이 한없이 늦춰질 때도 있다. 직장인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프리랜서니까 가끔은 그런 사치를 누린다. 물론 그 뒷감당은 온전히 내 몫으로 남지만.

저녁 식사 준비 전까지 그날의 업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저녁 설거지가 끝난 뒤 수당도 따로 나오지 않는 야간근무이자 초과근무를 시작한다. 진한 커피가 더욱 필요한 시간! 가족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는 거실 테이블로 작업실을 조용히 옮기기도 한다. 작업실 이삿짐은 역시나 맥북과 커피잔뿐으로, 단출하다.



부러워하거나 불쌍해하거나


여기까지가 내 평일의 대략적인 일과다. 물론 이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뒤의 일과다. 돌쟁이 떼쟁이 아이들을 돌보며 번역 일을 할 때는 이런 루틴을 꿈꿀 수조차 없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번역가들의 모습, 즉 책이나 원고로 둘러싸인 골방에서 피곤함에 쩔은 몰골로 밤새워 번역하거나 혹은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들어가 우아하게 안경을 쓰고 커피를 훌쩍대며 일하는 번역가들의 모습들도 세상 어딘가에 분명 있겠지만, 나는 그 중간 어디쯤 있다고나 할까.

이런 나의 일과를 들으면 종종 부러운 시선 반, 측은한 시선 반이 돌아온다.

직장 상사의 눈치, 직장동료의 시기 질투도 없고 불편한 회식 따위 없는 꿈의 직장. ‘월차? 반가? 그런 게 다 뭐래요?’ 하며 내 맘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나를 부러워하는 반면, 종일 후줄근한 모습으로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일해도 일반 직장인의 월급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수입에, 사회성이나 인간관계가 부족해지며, 일거리가 없으면 영락없이 백수로 보이는 나를 불쌍히 여기기도 한다.



집에서 일합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요즘은 워킹맘들이 워낙 많으니까, 엄마들 모임을 가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눌 때 이런 질문을 많이 듣는다.

“혹시 어디 다니세요?”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 묻는 게 아니라, 직장을 다니느냐 아니면 그냥 집에서 아이 키우고 살림만 하느냐를 묻는 뉘앙스의 질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들으면 별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집에서 일해요.”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한 반응들이 돌아오곤 했다.

어떤 이는 내 말을 ‘아뇨, 집에서 살림해요. 살림도 엄연히 일이니까요’라는 의미로 알아듣고는 “아… 네…” 하며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또 어떤 이는 내 말을 ‘아뇨, 직장은 안 다니고요, 집에서 부업으로 뭘 좀 하고 있어요’라는 의미로 알아듣고는 역시나 “아… 네…” 하며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집에서 살림하는 전업주부도, 성실하게 부업을 하는 여성도 그런 무시를 당해야 할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들이 한심하기도 하거니와, 직장은 없어도 ‘프리랜서 번역가’라는 엄연한 직업이 있는데 그런 반응을 받는 게 억울했던 나는 그 후로 오해를 없애고자 대답을 바꿨다.

“저요? 제가 책을 번역하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일합니다.”



내겐 너무 안성맞춤


집에서 혼자 일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워 놓아도 수많은 변수와 유혹이 존재하는 집에서 끊임없이 내적 갈등에 시달리며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좋다. 적성과 너무 잘 맞다. 다행히 엉덩이도 무겁고 혼자서도 잘 놀고 잘 먹는다. 자신과 싸워서 질 때도 많지만, 이겼을 때의 희열을 잘 아니까 열심히 나랑 싸우는 편이다.

앞으로도 나는 ‘안방’을 꼬박꼬박 ‘작업실’이라 부르고, 가끔은 아이들 앞에서 “엄마, 지금 출근한다!”라고 소리치며 안방으로 들어가는 출퇴근 퍼포먼스를 하면서 오래도록 프리랜서 재택근무를 즐기고 싶다. 제발!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