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건 프로필에 쓰면 안 되나요

by 눈큰
아버지의 프로필


남들만큼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한 친정아버지는 30년도 넘게 계란 도매업을 하셨다. 양계장에서 계란을 한 트럭 가져다가 작은 소매상에게 파는 일이었는데, 계란 한 판을 팔면 2~300원(그 옛날에는 30원일 때도 있었단다)밖에 남지 않을 만큼 돈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그마한 가게가 달린 방 두 칸짜리 낡은 집에서 평생 뼈 빠지게 일하셨고, 기꺼이 빚까지 내어 자식 셋을 기어코 대학에 다 보내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자식 셋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사는 것을 제일 뿌듯하게 여기신다. 당신의 자랑스러운 프로필 속에는 우리 세 남매가 들어 있는 것이다.

가끔 아버지는 묻지도 않았는데 남에게 그 프로필을 늘어놓으신다.

“우리 큰애가 공무원이야. 막내도 공무원이고. 둘째 딸은 중국어책을 번역해. 그 애가 번역한 책이 수십 권이나 된다니까!”

그럴 때면 나는 효녀도 아니면서 효녀라도 된 듯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곤 했다.



변화무쌍했던 장래 희망


어렸을 적 내 꿈은 번역가가 아니었다. 나의 첫 번째 장래 희망은 소설가였다. 작가들이 열심히 글을 쓰다가 글이 마음에 안 들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원고지를 뭉쳐 쓰레기통으로 내던지는 모습을 어디선가 보고는 멋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책을 사랑하는 문학소녀도 아니었으면서….

어린 내가 똥폼을 잡고 쓴 소설을 부모님 앞에서 낭독까지 한 적도 있었다. 소설 제목이 ‘잃어버린 사과나무’였던가? 아무튼 지금은 그 소설의 내용은커녕 제목조차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걸 듣고 어정쩡한 웃음을 지으시던 부모님의 표정은 아직 기억한다. 아마도 부모님은 꿈을 향한 딸의 도전을 응원해주고 싶었지만 형편없는 내 소설에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셨던 것 같다.


그 후 학창 시절 내내 내 진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만화가, 선생님, 도서관 사서, 군인 등.

그중에서도 가장 생뚱맞았던 건 ‘고고학자’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잔뜩 심취해서 생긴 결과였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떤 과에 진학해야 하는지도 알아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사시대 유물에 관한 책을 들춰보기도 했으며, 밤이면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 사막이며 유적지로 발굴 여행(솔직히 말하면 보물찾기 여행)을 떠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 나름으로는 상당히 진지했는데, 친언니가 그 얘기를 듣고는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의외로 쉬웠던 전공 선택


그렇게 이런 꿈 저런 꿈 기웃거리며 평범한 학창 시절을 지내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마침내 대학 원서를 써야 할 때가 왔다. 여전히 글쓰기는 좋아하고 글짓기상도 곧잘 탔지만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나는 차마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하지 못하고 중국어에 눈을 돌렸다.


당시는 홍콩 영화의 전성시대였다. <청옥불>(원제는 급동기협)’이란 영화를 보고 일찌감치 ‘원표(元彪)’라는 배우에 빠져 있던 나는 언젠가 원표를 만나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열렬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북경어와 광동어의 차이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나마 한자는 자신이 있었다. 중학교 내내 무서운 한자 선생님 밑에서 손바닥까지 맞아가며 한자를 외운 덕분이었다. 대학 면접 때 면접관 교수님이 물어보는 한자도 척척 알아맞혔다. 또 한시도 정말 좋아했다. 예스러운 말투로 해석된 한시들을 읽으면 진짜 어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때는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어서 중국이나 중국어에 대한 희망찬 기대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던 때였기에 부모님도 내 전공 선택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언니도 등짝 스매싱을 날리지 않았다.



평범한 삶 평범한 프로필


대학 졸업 후 우여곡절 끝에 적성에 딱 맞는 번역 일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번역가가 되겠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평범한 어린 시절과 평범한 대학 시절을 거친 나의 역자 프로필은 당연히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OO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번역 에이전시 XX에서 출판기획 및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10년 넘게 이 프로필을 가지고 번역을 해왔다. 주요 역서가 추가되어 점점 길어지긴 했지만 (가끔은 작가보다 역자인 내 프로필이 더 길게 실려 민망할 때도 있는데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필이었다.



프로필을 수정하라고요?


그런데 1년 반쯤 전에 번역 에이전시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지금 에이전시에서 역자들의 프로필을 대대적으로 업데이트하는데 내 프로필 약력이 조금 부족한 것 같으니 수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역자들의 프로필을 예시로 함께 받았다.

예시 프로필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또르르….

마음에 들지 않은 프로필을 바꿀 기회가 왔는데도 폼나는 경력 하나 추가할 게 없다니! ‘그동안 나는 대체 뭘 하고 살았나’ 하는 후회와 반성이 매섭게 찾아왔다. 평범한 과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번역을 시작한 뒤에 그럴싸한 뭔가를 만들어볼 생각은 왜 못했던 걸까? 난 왜 역서가 하나둘씩 추가되는 것에만 만족하면서 안일하게 살아온 걸까?


그러다가 문득 내게는 육아와 번역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날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왠지 억울하고 아까웠다. 그런 건 프로필에 적으면 안 되나요? 아버지의 훌륭한 프로필처럼.

결국 나는 며칠 고민한 끝에 나만의 소박한 새 프로필을 써 보냈다. 홍콩 영화와 한시, 두 아이 이야기는 물론이고 내가 얼마나 언어와 문장으로 작업하는 이 일을 사랑하는지를.

그 후 번역 에이전시는 최종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때마다 나의 새 프로필을 같이 보냈지만, 출판사에서는 지면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예전 프로필을 책에 실었다.



나만의 특별한 프로필을 위해


그래도 그 후 몇 권의 책에 수정된 새 프로필이 실리긴 했다. 기분이 좋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앞으로도 번역한 책의 성격이나 출판사의 성향, 지면 크기에 따라 내 프로필은 얼마든지 편집될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얼마나 더 번역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한 줄’을 끝끝내 프로필에 추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루하루 성실히 번역하면서 혹여 나를 설레게 하는 일에 생겼을 때 용기 내어 도전하면서 살아간다면 (이렇게 내 이야기를 글로 써서 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것처럼) 언젠가는 내 마음에 쏙 드는 나만의 특별한 프로필을 갖게 되지 않을까? 그럴 것이라 믿는다.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