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하면 뭐가 떠오르니?

by 눈큰


일하는 엄마와 아이


한창 번역과 육아, 두 지점을 스피드 운동하듯 필사적으로 오가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은 첫째 아이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쳐다보며 미친 듯이 키보드를 치고 있는 나를 흔들어대며 칭얼거렸다.

“엄마, 일하지 말고 나랑 놀아!”

하지만 마감을 코앞에 두고 화장실 갈 시간조차 아까웠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지금 일 안 하면 나중에 너 짱구 영화 보러 못 가. 이걸 얼른 끝내야 주말에 극장에 가서 짱구도 보고 팝콘도 사 먹지.”

그러자 첫째 아이는 “그럼 빨리 일해요!” 하더니 섭섭하리만큼 냉정하게 돌아서서 혼자 블록 놀이를 했다. 이제 엄마가 짱구랑 팝콘에 밀리는 거냐는 서운함도 잠시, 나는 곧장 다시 번역 일에 집중하곤 했다.


<일하는 엄마> 둘째 아이 作 2012



번역가 라이프의 산증인들


그렇게 달래거나 협박(?)하며 한 권 한 권 번역해가는 사이, 짱구 없이 못 살던 아이들은 어느새 스마트폰 없이 못 사는 중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동안 녀석들은 누구보다도 리얼한 번역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며 자랐다.

새로운 번역을 맡았다며 좋아서 방방 뛰던 엄마(아이들한테는 층간 소음 때문에 뛰지 말라고 잔소리하던 바로 그 엄마…), 거북처럼 목을 길게 빼고 키보드를 쪼갤 듯 두드리던 엄마, 번역하다 말고 적절한 우리말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며 머리를 쥐어뜯던 엄마, 그러다가 설거지 도중에 갑자기 딱 맞는 단어가 떠올랐다며 “유레카!”를 외치고는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노트북 앞으로 뛰어가던 엄마, 마감이 얼마 안 남아 연일 밤을 새우며 커피를 퍼마셨는데도 아이들보다 먼저 잠들어버린 엄마, 바쁠 때는 종종 식사 준비도 제때 못해서 “라면 먹을래?” 하며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엄마, 그렇지만 새로 출간된 책의 증정본이 도착하면 “이거 엄마가 번역한 거다! 여기 엄마 이름 보이지?”라고 큰소리로 자랑하던 엄마, 번역가는 일이 없을 때도 늘 공부해야 한다면서 애들이 숙제만 하면 옆에 붙어 앉아 같이 공부하며 귀찮게 굴던 엄마….


이제는 그런 엄마가 번역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물어도 척척 대답해주는 멋진 아이들. (내가 듬직한 사전 둘을 키웠나 봅니다.) 특히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번역할 때는 아이들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역할을 해준다. “엄마, 요즘 아이들은 이런 말 안 쓴다고요!”, “엄마,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쉬운 말로 좀 바꿔요!” 하면서 어찌나 착한 핀잔을 주는지. (내가 깐깐한 편집자 둘을 키웠나 봅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출간된 책들을 아이 친구들에게 선물하라고 나눠줬을 땐 번역가 엄마로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곤 했다. 비록 항상 집에 함께 있으면서도 책을 읽어주거나 놀아주지 못했고, 날씨 좋은 주말에도 일 핑계로 아빠랑 나들이 내보냈던 못난 엄마지만….



멋진 모습만 기억해주렴


아이들은 은근히 날 닮았다. 한번은 첫째 아이가 학교에서 자신의 진로 적성검사 결과지를 들고 왔는데, 어학 능력이 뛰어나 ‘번역가’나 ‘작가’가 적성에 맞다고 적혀 있었다. ‘태교를 번역으로 해서 그런가? 요 녀석이 날 닮았네’ 싶어 기분이 좋다가도 ‘번역가로는 먹고살기 힘들 텐데’ 싶어 미리 걱정이 앞섰다. 안 그래도 ‘미래에 사라지게 될 직업’ 하면 늘 1, 2위를 다투는 게 ‘번역가’인지라.

그뿐인가. 역시나 번역으로 태교를 한 둘째 아이가 글짓기를 곧잘 하고 집돌이 기질을 보일 때면 ‘저 녀석은 번역 일을 하면 왠지 잘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번역가’에 대해 실제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마감에 허덕이던 꾀죄죄한 번역가 엄마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사는 프로페셔널 번역가 엄마의 모습만 기억해주길.

오늘도 번역 일이 안 들어온다며 애들 앞에서 손톱만 물어뜯고 있는 엄마의 바람이다. nn